의사소통적 합리성 너머의 정동적 차원을 열며
: 젠더·어펙트연구소 2020 국내학술대회 후기
권 두 현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반(反)성폭력의 대안정동과 쓰기”라는 주제로 <연결신체 이론과 젠더·어펙트 연구> 사업단의 2020년 국내학술대회가 11월 7일(토)에 개최되었다. 충남도지사 안희정, 부산시장 오거돈, 서울시장 박원순으로 이어진 지자체장들의 권력형 성폭력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성별 권력’과 ‘정치 권력’이 겹쳐진 폭력에 대한 대안정동을 마련하고, 대안정동을 마련하는 방편으로서의 ‘쓰기’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는 성폭력을 둘러싼 ‘말하기’의 정치와 전략, 더 나아가 ‘쓰기’라는 실천의 행위주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이 다채롭게 교환되었다.
1. 성폭력에 관한 ‘말하기’와 ‘듣기’의 사운드스케이프 - 1부 “구조화된 성폭력과 지역의 젠더정치”에 관하여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안에는 사운드(sound)뿐만 아니라 항시적으로 노이즈(noise)가 병존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오가는 담론장을 사운드스케이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사운드와 노이즈는 음파의 정돈됨이나 균질함, 뚜렷함 등을 기준으로 분별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분별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따른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통념’이라는 수사를 앞세운 권력의 도구로서 전유되기 마련이라면, 합리성을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할 수 있는 다른 개념과 이론, 이에 따른 발화와 실천이 요청된다. 이 요청은 ‘정동’이라는 대안적인 전략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정동은 사실 ‘수(數)’의 총합 통치, 여론 ‘예측’ 정치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안 정치의 핵심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권명아는 한국 사회 권력 집단의 정파주의가 이처럼 ‘테크노 정동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성폭력 부정주의’를 실천한다고 주장한다. 권명아가 주목한 테크노 정동적 방식으로는 여론 조사가 젠더 차별을 합리화하는 사례, 법적인 의견 수렴 과정이 차별을 비가시화하고 차별이 민주적 절차로 정당화되는 과정, 차별을 정당화하는 ‘절차적 합리성’으로 자리 잡은 ‘사회적 합의’ 등이 있다. 권명아는 이와 같은 ‘사회통념적 합리성’에 의거한 정파적 여론 선동에 저항하는 대안 정치를 제안하며, 그 구체적 전략에 대해 묻는 허윤과의 토론을 통해 이러한 대안적 정동 정치가 의제 대표성을 세대별, 집단별로 나누어 가지는 분유의 전략, 그러면서도 이를 다시 한 번 아우르는 페미니즘 의제의 지속적 개발, ‘테크노 정동 네트워크’와는 다른 방식의 네트워크 활용 등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을 논의했다.
한편, 김은희는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로 공개된 사건이 여성노동자의 진로와 노동권이 걸린 ‘직장 내 성적 괴롭힘’ 문제임을 지적하며, ‘연루된 자의 정치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공통감각’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김은희의 논의는 ‘우리’라는 규정, ‘공동체’로서의 조직, ‘공통감각’으로 함께 하는 대항발화와 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어진 유현미의 토론은 ‘공동체’와 ‘우리’의 차원이 좀 더 분리되고 정교화될 필요가 있음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설정이 한편으로는 이것을 윤리적 성찰 이상으로 정치적 책임을 구체화하는 방식이 되지 못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다솔의 발표에 대한 권김현영의 토론 역시 이와 같은 정교화와 맥을 같이 한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폭력 사건의 경과를 타임라인으로 정리한 이다솔은 김은희와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마땅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권김현영은 바로 그 ‘일상’의 시간성에 대한 고민이 지금까지 부재했음을 지적한다. 피해자가 떠올리는 일상은 가해자와의 ‘원하지는 않았으나 거부할 수 없는’ 관계성이, 두려움이, 트라우마가 각인된 시공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사건 ‘이전’으로 막연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 ‘이후’ 피해자가 돌아갈 일상을 ‘만들어간다’는 방향으로 담론이 형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폭력 고발 이후의 사회 변화에 대한 의미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폭력 사건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이로 인한 변화가 만들어졌을 때의 새로운 일상, 즉 ‘미래로서의 일상’은 정동 이론이 즐겨 사용하는 어휘인 ‘약속’에 다름 아니다. “pro(앞/전에)+mittere(놓다, 보내다)”라는 어원을 지니는 약속은 미리/앞서 내놓는다는 뜻으로, 현재에 이미 미래에 대한 전망이 기입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정동적 약속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예측’과는 다른 미래를 그리는 (로랜 벌랜트식의) ‘잔혹한 낙관주의’를 내포한다.
2. 정동적 ‘쓰기’와 ‘읽기’ 사이의 우편 공간 - 2부 “정동적 읽기-쓰기와 문학의 정치성”에 관하여
‘말하기’와 ‘듣기’라는 의사소통의 또 다른 차원으로서 ‘쓰기’와 ‘읽기’가 있다. ‘쓰기’와 ‘읽기’, 그 사이의 의사소통적 과정을 자크 데리다는 ‘우편 공간’의 비유와 함께 이해하고 설명해보인 바 있다. 우편 발신자의 의도와 발신된 메시지, 그리고 발신자가 사전에 지정한 수신자와 사후적으로 수신자가 된 존재는 일치하지 않을 확률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 우편 공간의 전제 조건으로서 이와 같은 오배(誤配) 가능성이야말로 편지들을 송부시키는 근원적 힘이다. 수신자는 우편 공간을 떠도는 편지를 자신의 것으로 탈취함으로써, 즉 ‘수신자-되기’를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이처럼 ‘읽기’란, ‘되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쓰기’라는 실천을 의미화하는 ‘되기’이기도 하다.
권영빈이 주목한 정동적 읽기-쓰기의 사례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소설’은 종종 ‘르포’나 ‘보고’처럼 수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작품의 문학적 성취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이 반복적으로 논의되었다. 권영빈은 이 논의를 단순히 뒤집어 보이는 방식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권영빈에 따르면, 82년생 김지영은 ‘현상’으로서 독해 가능하다. 이 현상은 소설과 독자가 상호 참조하면서 발생하는 정동의 축적, 덧새김이 일종의 사회적 피드백 루프를 형성하고, 이것이 다시 소설-독자의 자기조직의 기반이자 변화의 조건이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데, 이 사실은 작품의 문예-미학적 구조가 아닌, 정동의 교육-미학적(pedagogico-aesthetic) 효과에 주목했을 때 비로소 포착 가능한 것이다. 강지희의 토론은 이러한 ‘김지영 현상’의 효과가 최근 문학장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개별적 ‘독자’에 관한 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한층 부각해보였다.
권영빈이 제기한 정동적 ‘쓰기’의 문제의식은 권위주의적 주체로서 ‘저자’라는 일원화된 모델에 대한 의문을 수반한다. 김대성이 주목한 ‘노동자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자 글쓰기란, 노동에 관해 씀으로써 이루어지는 노동자-되기와, 글을 씀으로써 노동자하는 신체가 아닌 다른 존재-되기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즉 유목적 주체화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동문학’ 또는 ‘민중문학’과 이에 관한 연구는 그 ‘되기’의 다양한 양태들을 고착된 문학 제도 내부로 불러들이는 데, 일정 부분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노동자의 존재론적 위치로부터 글쓰기의 인식론, 글쓰기에 관한 인식론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의가 이어졌고, 배하은의 토론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에 바탕을 둔 연구의 갈래와 미래를 가늠해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단순히 문학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도에 환수되지 않고, 되어서도 안 되는 ‘공통적인 것’을 탈환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 글쓰기를 재의미화하는 작업은 긴요해 보인다.
학술대회 2부 “정동적 읽기-쓰기와 문학의 정치성”은 이처럼 ‘되기’의 관점, 그리고 ‘위치의 정치’라는 관점과 함께 글과 저자, 그리고 독자, 더 나아가 문학과 사회가 배치된 관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보이기 위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였다. 존재론적 조건으로서 ‘관계’와 ‘위치’는 ‘현상’을 바꾼다. 예컨대, 박원순 사건을 대하는 ‘586’ 여성과 『82년생 김지영』을 받아들이는 ‘2030’ 여성의 경험이란, 같으면서도 다른 정동에 휩싸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본과 기계를 앞에 두고 전태일이 경험했던 것과, 다시 한 번 전태일을 앞에 둔 ‘여공’이 경험했던 것은 분명 상이한 형태의 ‘위치의 정치’였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상황들을 일관된 이념적 프레임이 아니라 복수의 정동적 흐름으로서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는 이번 학술대회 이후에 작성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서, 바로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안된 것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 너머의 정동적 차원을 열며
: 젠더·어펙트연구소 2020 국내학술대회 후기
권 두 현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반(反)성폭력의 대안정동과 쓰기”라는 주제로 <연결신체 이론과 젠더·어펙트 연구> 사업단의 2020년 국내학술대회가 11월 7일(토)에 개최되었다. 충남도지사 안희정, 부산시장 오거돈, 서울시장 박원순으로 이어진 지자체장들의 권력형 성폭력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성별 권력’과 ‘정치 권력’이 겹쳐진 폭력에 대한 대안정동을 마련하고, 대안정동을 마련하는 방편으로서의 ‘쓰기’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는 성폭력을 둘러싼 ‘말하기’의 정치와 전략, 더 나아가 ‘쓰기’라는 실천의 행위주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이 다채롭게 교환되었다.
1. 성폭력에 관한 ‘말하기’와 ‘듣기’의 사운드스케이프 - 1부 “구조화된 성폭력과 지역의 젠더정치”에 관하여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안에는 사운드(sound)뿐만 아니라 항시적으로 노이즈(noise)가 병존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오가는 담론장을 사운드스케이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사운드와 노이즈는 음파의 정돈됨이나 균질함, 뚜렷함 등을 기준으로 분별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분별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따른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통념’이라는 수사를 앞세운 권력의 도구로서 전유되기 마련이라면, 합리성을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할 수 있는 다른 개념과 이론, 이에 따른 발화와 실천이 요청된다. 이 요청은 ‘정동’이라는 대안적인 전략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정동은 사실 ‘수(數)’의 총합 통치, 여론 ‘예측’ 정치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안 정치의 핵심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권명아는 한국 사회 권력 집단의 정파주의가 이처럼 ‘테크노 정동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성폭력 부정주의’를 실천한다고 주장한다. 권명아가 주목한 테크노 정동적 방식으로는 여론 조사가 젠더 차별을 합리화하는 사례, 법적인 의견 수렴 과정이 차별을 비가시화하고 차별이 민주적 절차로 정당화되는 과정, 차별을 정당화하는 ‘절차적 합리성’으로 자리 잡은 ‘사회적 합의’ 등이 있다. 권명아는 이와 같은 ‘사회통념적 합리성’에 의거한 정파적 여론 선동에 저항하는 대안 정치를 제안하며, 그 구체적 전략에 대해 묻는 허윤과의 토론을 통해 이러한 대안적 정동 정치가 의제 대표성을 세대별, 집단별로 나누어 가지는 분유의 전략, 그러면서도 이를 다시 한 번 아우르는 페미니즘 의제의 지속적 개발, ‘테크노 정동 네트워크’와는 다른 방식의 네트워크 활용 등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을 논의했다.
한편, 김은희는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로 공개된 사건이 여성노동자의 진로와 노동권이 걸린 ‘직장 내 성적 괴롭힘’ 문제임을 지적하며, ‘연루된 자의 정치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공통감각’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김은희의 논의는 ‘우리’라는 규정, ‘공동체’로서의 조직, ‘공통감각’으로 함께 하는 대항발화와 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어진 유현미의 토론은 ‘공동체’와 ‘우리’의 차원이 좀 더 분리되고 정교화될 필요가 있음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설정이 한편으로는 이것을 윤리적 성찰 이상으로 정치적 책임을 구체화하는 방식이 되지 못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다솔의 발표에 대한 권김현영의 토론 역시 이와 같은 정교화와 맥을 같이 한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폭력 사건의 경과를 타임라인으로 정리한 이다솔은 김은희와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마땅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권김현영은 바로 그 ‘일상’의 시간성에 대한 고민이 지금까지 부재했음을 지적한다. 피해자가 떠올리는 일상은 가해자와의 ‘원하지는 않았으나 거부할 수 없는’ 관계성이, 두려움이, 트라우마가 각인된 시공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사건 ‘이전’으로 막연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 ‘이후’ 피해자가 돌아갈 일상을 ‘만들어간다’는 방향으로 담론이 형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폭력 고발 이후의 사회 변화에 대한 의미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폭력 사건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이로 인한 변화가 만들어졌을 때의 새로운 일상, 즉 ‘미래로서의 일상’은 정동 이론이 즐겨 사용하는 어휘인 ‘약속’에 다름 아니다. “pro(앞/전에)+mittere(놓다, 보내다)”라는 어원을 지니는 약속은 미리/앞서 내놓는다는 뜻으로, 현재에 이미 미래에 대한 전망이 기입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정동적 약속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예측’과는 다른 미래를 그리는 (로랜 벌랜트식의) ‘잔혹한 낙관주의’를 내포한다.
2. 정동적 ‘쓰기’와 ‘읽기’ 사이의 우편 공간 - 2부 “정동적 읽기-쓰기와 문학의 정치성”에 관하여
‘말하기’와 ‘듣기’라는 의사소통의 또 다른 차원으로서 ‘쓰기’와 ‘읽기’가 있다. ‘쓰기’와 ‘읽기’, 그 사이의 의사소통적 과정을 자크 데리다는 ‘우편 공간’의 비유와 함께 이해하고 설명해보인 바 있다. 우편 발신자의 의도와 발신된 메시지, 그리고 발신자가 사전에 지정한 수신자와 사후적으로 수신자가 된 존재는 일치하지 않을 확률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 우편 공간의 전제 조건으로서 이와 같은 오배(誤配) 가능성이야말로 편지들을 송부시키는 근원적 힘이다. 수신자는 우편 공간을 떠도는 편지를 자신의 것으로 탈취함으로써, 즉 ‘수신자-되기’를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이처럼 ‘읽기’란, ‘되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쓰기’라는 실천을 의미화하는 ‘되기’이기도 하다.
권영빈이 주목한 정동적 읽기-쓰기의 사례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소설’은 종종 ‘르포’나 ‘보고’처럼 수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작품의 문학적 성취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이 반복적으로 논의되었다. 권영빈은 이 논의를 단순히 뒤집어 보이는 방식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권영빈에 따르면, 82년생 김지영은 ‘현상’으로서 독해 가능하다. 이 현상은 소설과 독자가 상호 참조하면서 발생하는 정동의 축적, 덧새김이 일종의 사회적 피드백 루프를 형성하고, 이것이 다시 소설-독자의 자기조직의 기반이자 변화의 조건이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데, 이 사실은 작품의 문예-미학적 구조가 아닌, 정동의 교육-미학적(pedagogico-aesthetic) 효과에 주목했을 때 비로소 포착 가능한 것이다. 강지희의 토론은 이러한 ‘김지영 현상’의 효과가 최근 문학장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개별적 ‘독자’에 관한 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한층 부각해보였다.
권영빈이 제기한 정동적 ‘쓰기’의 문제의식은 권위주의적 주체로서 ‘저자’라는 일원화된 모델에 대한 의문을 수반한다. 김대성이 주목한 ‘노동자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자 글쓰기란, 노동에 관해 씀으로써 이루어지는 노동자-되기와, 글을 씀으로써 노동자하는 신체가 아닌 다른 존재-되기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즉 유목적 주체화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동문학’ 또는 ‘민중문학’과 이에 관한 연구는 그 ‘되기’의 다양한 양태들을 고착된 문학 제도 내부로 불러들이는 데, 일정 부분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노동자의 존재론적 위치로부터 글쓰기의 인식론, 글쓰기에 관한 인식론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의가 이어졌고, 배하은의 토론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에 바탕을 둔 연구의 갈래와 미래를 가늠해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단순히 문학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도에 환수되지 않고, 되어서도 안 되는 ‘공통적인 것’을 탈환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 글쓰기를 재의미화하는 작업은 긴요해 보인다.
학술대회 2부 “정동적 읽기-쓰기와 문학의 정치성”은 이처럼 ‘되기’의 관점, 그리고 ‘위치의 정치’라는 관점과 함께 글과 저자, 그리고 독자, 더 나아가 문학과 사회가 배치된 관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보이기 위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였다. 존재론적 조건으로서 ‘관계’와 ‘위치’는 ‘현상’을 바꾼다. 예컨대, 박원순 사건을 대하는 ‘586’ 여성과 『82년생 김지영』을 받아들이는 ‘2030’ 여성의 경험이란, 같으면서도 다른 정동에 휩싸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본과 기계를 앞에 두고 전태일이 경험했던 것과, 다시 한 번 전태일을 앞에 둔 ‘여공’이 경험했던 것은 분명 상이한 형태의 ‘위치의 정치’였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상황들을 일관된 이념적 프레임이 아니라 복수의 정동적 흐름으로서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는 이번 학술대회 이후에 작성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서, 바로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안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