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을 향한 꿈
―자크 랑시에르, 프롤레타리아의 밤(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1) 후기(1)
김대성
1
『무지한 스승』(양창렬, 궁리, 2008/2016)의 번역 출간과 함께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은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방할 수 있는 역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었다.
‘이명박근혜’ 시기를 힘겹게 지나면서 랑시에르가 실증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인민들의 해방가능성은
양극화의 가속력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보수화되던 한국 사회에 다른 파선을 그릴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더 이상의 혁명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한국 사회가 ‘촛불 시위’로 타올랐던 건, ‘촛불 시민들’의 봉기 때문이었을까.
이 일련의 흐름을 그저 ‘촛불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충분할까.
광장에 모였던 다종한 목소리, 힘, 욕망을 ‘정권 교체’라는 앙상한 대의 안에 가둘 수 없지 않은가.
저마다의 광장에서 보았던 것은 ‘연대의 힘’이 아니라 ‘마주침(충돌과 어긋남)의 힘’이지 않았을까.
그 대의가 고작 정권 유지라는 앙상한 것으로 남아 오늘도 미루어지고 밀려나는 시급한 문제들을 상기해본다면 더욱더 그렇지 않은가.
이 시기 1980년대 한국 노동자의 글쓰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건 우연이 아니다.
‘촛불 정국’에서 시민적 역량을 (재)발견한 것처럼 70-80년대 노동자들의 글에서 캐내려고 했던 것은
제도화된 문학과는 다른 변혁의 열망으로 가득한 문학적 에너지였을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내장되었던 다른 문학이 있었음을, 다시금 찾고자 했던 욕망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누군가는 문학의 혁명적 가능성으로, 누군가는 새롭게 써야 할(다시 말해 갱신되어야 할) 문학사로,
누군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생생한 연구 대상으로, 누군가는 (남성) 엘리트 문학과 충돌하는 반문학으로...
그런데 이 다종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없다는 건 어딘지 이상하다.
충돌이 없으니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배치가 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갈등하지 않고 경합하지 않되 변혁적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글쓰기를 도구화 및 대상화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지 않을까.
신군부 독재의 언로 장악으로 문학 제도가 무너졌을 때, 더불어 활로를 찾지 못했던 민족문학이 노동자들의 글쓰기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했던 것처럼, 그러나 ‘87 혁명’ 이후 제도가 정상화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비주류적인 글쓰기에 할당되었던 문학의 자리를 다시 강탈당했음을 거듭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의 가능성이 아니라 마주침의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경합하고 갈등하는 국면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많은 문학, 다른 문학, 비문학과 반문학, 아래로부터의 문학, 제도가 독점할 수 없는 문학 등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을 명징하게 하지 않을까.
2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랑시에르는 진정한 노동자다움이 아닌
노동자가 아닌 다른 이가 되고자 했던 열망으로 가득 찼던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에 집중한다.
철물공이자 시인이었던 제롬-피에르 질랑이 자신의 노동을 가리켜 “쇠를 두드리면서는 내 천직이 아니구나 싶거든”이라며
진정으로 되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화가였음을 말할 때,
19세기의 잔인한 착취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들만의 문화, 노동계급만의 의식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고 이론화했던 혁명 이론가들의 논의는 갈곳을 잃는다.
이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꿔야 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 허용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노동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라고 보아온 이론의 역사에서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결국 노동자를 노동자의 자리에만 있도록 만드는 것이며
노동자는 그저 일하는 존재, 노동환경이나 임금에 불만을 갖고 투쟁하는 존재,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서 더 나은 환경에서 다시 일하는 존재,
달리 말해 ‘노동자는 언제나 노동자일 뿐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가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고에서 확인한 노동자들의 글에서 발견한 건 부르주아지가 될 수 없으면서도 부르주아지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고
부르주아지의 꿈을 꾸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욕망이었다.
꿈꾸는 노동자들, 수다쟁이들, 엉터리 시를 짓는 이들, 추론하는 자들, 궤변을 일삼는 자들,
차용된 말들로 자신의 언술을 구성하는 도착적인 프롤레타리아들, 랑시에르는 이 모순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노동자들의 글에서 랑시에르는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꿈을 발견한다.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꿈꾸는 노동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작업은 “보기 좋은 겉모습 아래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폭로하는 낡은 정치적 허풍”이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도록 표면의 그림을 긁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상들이 조합되고 해체되도록 그림들을 흔들어놓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노동자의 글을 분석함으로써 텍스트 밑에 숨겨진 사회적 진실이나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허구들이 뒤섞여 있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글 속에서 어떤 다른 세상이 구성되고 있는지를 드러나도록 하려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글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글을 바꿔 쓰는 작업을 한다.
노동자들의 글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개념으로 추상화하기보다는
글을 따라 읽으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 단락과 단락 사이, 글과 글 사이를 이어가면서 관계를 만들어내면서
기존의 개념적 틀로 걸러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생각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 이 문학작품과 같은 내용과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3
『프롤레타리아의 밤』 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수행해온 보편적인 노동자성이나 좌파 이론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의 행위로 쓴 저작이라 할 수 있다.
1830~1850년 사이에 쓰인 프랑스 노동자들의 글쓰기는 ‘아직 아님의 시대’에서 ‘더 이상 아님의 시대’(1848)를 관통한다.
생시몽주이자이면서 수공업자였고 또한 자영업자이기도 했던 노동자는 하나의 계급(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들이 꿈꾸었던 이상과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단일한 프롤레타리아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라 평가되었던 생시몽주의자들.
랑시에르가 주목했던 것은 노동하는 사람이 사유하는 사람으로, 사유하는 사람이 노동하는 사람으로,
“고귀한 정념들의 비밀을 배우고자 하는 주변적인 노동자들과 프롤레타이아의 고통을 돌보고자 하는
주변적 지식인들 사이에 생긴 미증유의 마주침들이요 순간들의 대화들”이었다.
이행하고자 했던 주변적인 지식인과 주변적 노동자들의 마주침이었다.
이들에게 해방의 방식은 ‘연대’가 아니라 누군가가 해방됨으로써 또 다른 이들도 해방될 수 있음을,
누구라도 자리를 옮길 수 있음을 알리고 또 깨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의 밤』 은 이론적 저작이 아니라 개입의 행위로 쓴 저작으로 봐야한다.
19세기 노동자성이라는 보편이론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문서고에서 발견한 글을 그들이 꿈꿨던 세계를 재구축하는 개입의 방식으로 독해하고
그 독해를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국지적인 이론들은 랑시에르가 이 책을 이데올로기‘들’의 역사적 유물론 쓰기를 하고 있음을 말한다.
다른 세상을 향한 꿈
―자크 랑시에르, 프롤레타리아의 밤(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1) 후기(1)
김대성
1
『무지한 스승』(양창렬, 궁리, 2008/2016)의 번역 출간과 함께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은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방할 수 있는 역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었다.
‘이명박근혜’ 시기를 힘겹게 지나면서 랑시에르가 실증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인민들의 해방가능성은
양극화의 가속력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보수화되던 한국 사회에 다른 파선을 그릴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더 이상의 혁명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한국 사회가 ‘촛불 시위’로 타올랐던 건, ‘촛불 시민들’의 봉기 때문이었을까.
이 일련의 흐름을 그저 ‘촛불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충분할까.
광장에 모였던 다종한 목소리, 힘, 욕망을 ‘정권 교체’라는 앙상한 대의 안에 가둘 수 없지 않은가.
저마다의 광장에서 보았던 것은 ‘연대의 힘’이 아니라 ‘마주침(충돌과 어긋남)의 힘’이지 않았을까.
그 대의가 고작 정권 유지라는 앙상한 것으로 남아 오늘도 미루어지고 밀려나는 시급한 문제들을 상기해본다면 더욱더 그렇지 않은가.
이 시기 1980년대 한국 노동자의 글쓰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건 우연이 아니다.
‘촛불 정국’에서 시민적 역량을 (재)발견한 것처럼 70-80년대 노동자들의 글에서 캐내려고 했던 것은
제도화된 문학과는 다른 변혁의 열망으로 가득한 문학적 에너지였을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내장되었던 다른 문학이 있었음을, 다시금 찾고자 했던 욕망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누군가는 문학의 혁명적 가능성으로, 누군가는 새롭게 써야 할(다시 말해 갱신되어야 할) 문학사로,
누군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생생한 연구 대상으로, 누군가는 (남성) 엘리트 문학과 충돌하는 반문학으로...
그런데 이 다종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없다는 건 어딘지 이상하다.
충돌이 없으니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배치가 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갈등하지 않고 경합하지 않되 변혁적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글쓰기를 도구화 및 대상화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지 않을까.
신군부 독재의 언로 장악으로 문학 제도가 무너졌을 때, 더불어 활로를 찾지 못했던 민족문학이 노동자들의 글쓰기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했던 것처럼, 그러나 ‘87 혁명’ 이후 제도가 정상화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비주류적인 글쓰기에 할당되었던 문학의 자리를 다시 강탈당했음을 거듭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의 가능성이 아니라 마주침의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경합하고 갈등하는 국면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많은 문학, 다른 문학, 비문학과 반문학, 아래로부터의 문학, 제도가 독점할 수 없는 문학 등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을 명징하게 하지 않을까.
2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랑시에르는 진정한 노동자다움이 아닌
노동자가 아닌 다른 이가 되고자 했던 열망으로 가득 찼던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에 집중한다.
철물공이자 시인이었던 제롬-피에르 질랑이 자신의 노동을 가리켜 “쇠를 두드리면서는 내 천직이 아니구나 싶거든”이라며
진정으로 되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화가였음을 말할 때,
19세기의 잔인한 착취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들만의 문화, 노동계급만의 의식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고 이론화했던 혁명 이론가들의 논의는 갈곳을 잃는다.
이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꿔야 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 허용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노동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라고 보아온 이론의 역사에서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결국 노동자를 노동자의 자리에만 있도록 만드는 것이며
노동자는 그저 일하는 존재, 노동환경이나 임금에 불만을 갖고 투쟁하는 존재,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서 더 나은 환경에서 다시 일하는 존재,
달리 말해 ‘노동자는 언제나 노동자일 뿐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가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고에서 확인한 노동자들의 글에서 발견한 건 부르주아지가 될 수 없으면서도 부르주아지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고
부르주아지의 꿈을 꾸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욕망이었다.
꿈꾸는 노동자들, 수다쟁이들, 엉터리 시를 짓는 이들, 추론하는 자들, 궤변을 일삼는 자들,
차용된 말들로 자신의 언술을 구성하는 도착적인 프롤레타리아들, 랑시에르는 이 모순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노동자들의 글에서 랑시에르는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꿈을 발견한다.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꿈꾸는 노동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작업은 “보기 좋은 겉모습 아래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폭로하는 낡은 정치적 허풍”이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도록 표면의 그림을 긁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상들이 조합되고 해체되도록 그림들을 흔들어놓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노동자의 글을 분석함으로써 텍스트 밑에 숨겨진 사회적 진실이나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허구들이 뒤섞여 있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글 속에서 어떤 다른 세상이 구성되고 있는지를 드러나도록 하려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글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글을 바꿔 쓰는 작업을 한다.
노동자들의 글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개념으로 추상화하기보다는
글을 따라 읽으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 단락과 단락 사이, 글과 글 사이를 이어가면서 관계를 만들어내면서
기존의 개념적 틀로 걸러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생각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 이 문학작품과 같은 내용과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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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의 밤』 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수행해온 보편적인 노동자성이나 좌파 이론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의 행위로 쓴 저작이라 할 수 있다.
1830~1850년 사이에 쓰인 프랑스 노동자들의 글쓰기는 ‘아직 아님의 시대’에서 ‘더 이상 아님의 시대’(1848)를 관통한다.
생시몽주이자이면서 수공업자였고 또한 자영업자이기도 했던 노동자는 하나의 계급(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들이 꿈꾸었던 이상과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단일한 프롤레타리아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라 평가되었던 생시몽주의자들.
랑시에르가 주목했던 것은 노동하는 사람이 사유하는 사람으로, 사유하는 사람이 노동하는 사람으로,
“고귀한 정념들의 비밀을 배우고자 하는 주변적인 노동자들과 프롤레타이아의 고통을 돌보고자 하는
주변적 지식인들 사이에 생긴 미증유의 마주침들이요 순간들의 대화들”이었다.
이행하고자 했던 주변적인 지식인과 주변적 노동자들의 마주침이었다.
이들에게 해방의 방식은 ‘연대’가 아니라 누군가가 해방됨으로써 또 다른 이들도 해방될 수 있음을,
누구라도 자리를 옮길 수 있음을 알리고 또 깨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의 밤』 은 이론적 저작이 아니라 개입의 행위로 쓴 저작으로 봐야한다.
19세기 노동자성이라는 보편이론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문서고에서 발견한 글을 그들이 꿈꿨던 세계를 재구축하는 개입의 방식으로 독해하고
그 독해를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국지적인 이론들은 랑시에르가 이 책을 이데올로기‘들’의 역사적 유물론 쓰기를 하고 있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