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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지방대학 소멸’이란 예언 앞에서 (신민희)

젠더어펙트연구소
2021-07-14
조회수 414


한반의 반도_12


지방대학의 소멸을 전하는 뉴스에는, 소멸될지도 모르는 이곳에 교수와 학생 이외에 많은 이들이 구성원으로 있다는 사실이 지워지고 있다.

 ‘벚꽃 엔딩’이라는, 순서상의 문제처럼 보이는 이 말은 소수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묵시록적인 말을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있다. 

지역의 위기, 신입생 충원율 미달이라는 상황에서 지방대학이 마련할 수 있는 자구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여년 동안 아버지 밑에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느라 허둥대며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 지붕 밑에서 큰소리 내지 않고 사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되돌아보면 그건 그저 시늉일 뿐이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의 내 자리, 가부장적 질서를 상상하면서 만든 가족의 허상 때문에 번번이 절망했다. 

그러다 반년 전 마침내 독립을 감행했다. 

감행이라 말하는 것은, 아버지를 집에 두고 간다는 그 마음은 차마 두고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려놓지 못한 마음은 아버지를 돌보지 않고 떠난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결혼해서 독립하라는, 한번쯤 해봄 직한 요구조차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말이 아닌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 돌봄에의 압력은 가족 내에서 여성에게 할당된 ‘의무’ 조항임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 결정은 강사 ‘자리’에 의존해 일자리를 얻으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대학의 위기가 만연한 지금 비정규직 강사라는 자리가 언제까지 보장될지, 독립생활은 또 언제까지 이어질지 미지수다. 

그럼에도 지방대학이 독립이나 자립을 위한 ‘기반’이 된다는 말은 사적 삶이 공적 돌봄에 연루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고령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돌봄을 둘러싼 의제는 사적 영역에 한정될 수 없다. 

부산은 청년인구 감소와 고령인구 증가라는 가파른 곡선 위에서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방대학의 소멸을 전하는 뉴스에는, 소멸될지도 모르는 이곳에 교수와 학생 이외에 많은 이들이 구성원으로 있다는 사실이 지워지고 있다. 

관리직 노동자들, 식당과 매점 운영자나 직원, 셔틀버스 운전자, 청소노동자 역시 지방대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구성원이자 주체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역주민이고 지방대학은 이들의 삶의 기반이다. 

학교를 산책 삼아 오는 주민, 스포츠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새끼를 낳은 고양이와 화단에 핀 수선화까지도 지방대학을 삶의 터로 삼고 있다.


지워진 이들은 죽음을 통해서만 다시 뉴스가 된다. 

죽음이 사건화되면 그때서야 책임 소재를 가리느라 바쁘다. 

그러나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책임을 묻는 이들도, 죽음 이전에 이미 대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들을 지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건 불문에 부치고 있다.

지방대에 대해서는 ‘대학 레벨’이라는 능력주의와 학력차별 체제에 의한 삭제와 소멸의 과정에 의문조차 갖지 않는다. 

미달, 미충원, 구조조정, 감축 등 온갖 마이너스 지표로 가득한 지방대학의 대학평가지표와 

이를 보도하여 부추기는 뉴스와 담론들에는 지방대학을 구성하는 존재들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러한 삭제는 오직 ‘미달’과 같은 지표로 지역과 지방대학을 외부화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지방대 비정규직 여성 강사’의 독립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고령화, 지방대학의 소멸과 같이 지역이 당면한 공적 돌봄의 위기와 관련된다. 

또 공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지역의 공론장에 거의 부재한 데서 비롯된다. 

이는 가족 내에서의 돌봄 위기와도 긴밀하게 닿아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돌봄 체제를 사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패러다임을 비판하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할 자체를 넘어서는 대안 체제로서의 다른 돌봄 체제를 제시하는 건 바로 이런 맥락이다. 

지방대학의 위기와 지역소멸의 위협은 생산과 재생산의 위기가 맞물려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지방대학 위기와 지역소멸을 당연한 자연사의 과정으로 전하는 뉴스는 지역주민에게는 죽음을 판결하는 무시무시한 선고처럼 들린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벚꽃 엔딩’의 자조적 수사는 누구에게나, 어느 지방에서나 ‘만연’한 사실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순서상의 문제처럼 보이는 이 말은 소수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묵시록적인 말을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있다. 

지역의 위기, 신입생 충원율 미달이라는 상황에서 지방대학이 마련할 수 있는 자구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지방대학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가 워낙 제한적인데다, 제한적 선택지 안에서 평가지표에 따른 성과마저 내야 하는 이중적 어려움에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대학의 주요 구성원인 강사와 학생 사이의 ‘돌봄’ 또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고 대학의 위기는 한층 강화된다. 

거듭, 지역대학을 다종한 구성원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전환은 지방대학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부산이라는 지역이 오랫동안 활용해온 프레임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지방정부는 지역 재생산 구조의 붕괴에 대해 행사나 사업 ‘유치’로 돌파구를 찾으려 해왔다. 

부산의 곳곳에서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 

월드엑스포, 신공항, 최근에는 ‘이건희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지방대학에서 지자체까지 모두가 사로잡힌 ‘혁신’, ‘유치’라는 말은 실은 지역을 향해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무기력하다”는 심문의 말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지역을 외부로 만들어 사라져야 할 것으로 만드는 방식은, 학령인구 감소라는 지표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실상 이는 학력차별과 학벌주의를 통해 지역을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서, 이를 내면화하도록 심문하고 요구하는 차별 정당화의 기제일 뿐이다. 

이렇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혁신과 유치라는 전략이 아닌,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서의 돌봄과 독립의 실천으로 지역 시스템이 전환되어야 한다.


‘사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가족 관계에서 독립한 후 서로의 위치에서 상호 의존하고 돌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부양의 의무로만 여겼던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정작 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거리 속에서 더 많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독립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의존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공간에 거주했지만, 그것은 ‘함께하고 있음’이 아니라 민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독립을 통해 ‘독립’이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잘 의존하는 것임을 배웠다.


마찬가지로 지방소멸, 지방대학 소멸이라고 기정사실화된 선언들 앞에서 또 다른 위치 감각을 얻었다. 

일자리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께 다져온’ 지반을 잃는다는 상호 의존의 감각이다. 

지방대학은 사라져야 한다거나, 지역의 자긍심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선택지 앞에서 더는 서성거리지 않게 되었다. 

소멸과 자긍심은 마이너스라는 지표를 전제하고 있다. 

부산의 경우 이 마이너스라는 지표와 그것이 부여한 존재의 좌표는, ‘제2의 도시’라는 그간 부산이 ‘누리면서 벗어나려던’ 위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방대학을 ‘소멸의 운명’이나 ‘자긍심’으로 보는 양자택일의 관점이 아니라, 지역의 삶을 지탱하는 ‘공적 돌봄 체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공적 돌봄 체계는 차별 시스템 속에서 서로 ‘경쟁력’을 입증하려고 순위를 다투도록 하는 제로섬 게임에서 지역을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대안이다. 

지역 시스템을 공적 돌봄 체계로 변환함으로써만 차별 위계를 넘어서 독립과 상호 의존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지방대학이 소멸할 것이라는 수없는 예언 속에서, 지방대학에서 공부하고 지방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방대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동안 차별의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자책의 고리는 쉽게 끊어내기 힘들었다.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차별의 지표로부터 벗어나 지방대를 삶의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바람일 수도 있다. 

대학에 있을수록 대학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타자화되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안과 바람은 비정규직 여성 강사의 위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 위치 설정 시스템을 바꿀 때만이 불안은 잦아들고 소망은 현실이 된다. 

개인적 소망은 이렇게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고 또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기본 이념이 오늘날 부산, 지방대, 비정규직, 여성인 

나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해석 방법이 되는 이유다.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33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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