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의 반도_16
오늘 부산에서 먹은 돼지국밥의 맛을 “뒷맛이 쓰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 부산의 이미지를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환원해버린 차별적 지리 감각에 대해 뒷맛이 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부산을 찾은 야권의 대선주자는 지역 주민을 대접한답시고 지역 소주 ‘대선’을 홀짝이며 바로 돼지국밥을 낮술의 안주로 삼았다.
‘한철 손님’ 덕분에, 나는 돼지국밥을 즐기는 원주민의 몸이 된다.
‘원주민’이라는 말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그 울타리는 지역이라는 경계뿐만 아니라,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비물질적 경계를 함께 드러낸다.
맛과 냄새는 지역에 ‘취향 공동체’의 울타리를 세우는 동시에, 감각하는 몸을 활성화하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울타리를 없앤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맛과 냄새를 내장한 ‘밈’이 ‘혐오’와 함께 지역의 울타리 안으로 쏟아진다.
밈은 원래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 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 단위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단위 가운데 하나가 맛과 냄새를 통해 감각되는 정보로서의 음식이다.
예컨대, 부산을 지칭하는 경멸적 밈 가운데 하나인 ‘스까국’은 무엇이든 섞어 먹는,
아니, ‘스까 묵는’ 괴이한 신진대사의 몸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나라라는 뜻으로,
사투리를 동원해 지역을 괴식으로 수렴하면서 미각과 후각을 즉각적으로 촉발한다.
벤 하이모어가 밝혔듯,
서구사상에서 ‘맛’과 냄새는 취향 또는 안목을 저급화하고 혐오감을 불러들이는 매개로 쓰였다.
땅에서 나서 몸의 내부에 편성되는 음식은 몸과 땅을 동시에 야만화하는 수단이 된다.
평생 관심도 없던 지방과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한철 관심을 표명하는 언사가 유독 음식을 매개로 드러나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야만화 속에서 음식은 코먼스로서의 공통성을 약탈당하고 ‘향토’의 표상과 ‘구빈원’의 시혜 품목이 된다.
누군가가 말아먹은, 누구나가 말아먹는 돼지국밥에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스까국’의 밈이 짙은 농도로 섞여 있다.
참새 시리즈에서 인터넷 밈까지, 밈을 사용하면서 누구나 자신이 ‘유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꾸로 밈이 주인 자리를 꿰차는 일도 빈번하다.
이 원리는 차별적 밈에 대응할 때조차 딜레마로 작동한다.
방역수칙을 가뿐히 망각한 보수 정치인들을 들러리 세웠을 뿐,
‘비수도권’에서 벌어진 대낮의 술판은 사실상 지역 차별의 밈이 가동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작 돼지국밥 정도가 무슨’ 또는 ‘겨우 밈 따위가 무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웃고 즐기자고,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각국을 방사능의 땅, 인플레이션의 땅,
괴물과 폭도들의 땅으로 소개하며 화면 곳곳에 촘촘히 혐오를 새겨넣은 <엠비시>(MBC) 또한 마찬가지다.
이 어처구니없는 작태는 사실상 관습의 인용이라 할 만하다.
그 관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어 흘러들었는지 한국의 남성들은 곧바로 명쾌한 답을 들려주었다.
이들은 한국 여성 금메달리스트의 헤어스타일이 ‘숏컷’이니 페미니스트일 것이라 단정했고 사이버불링을 자행했다.
<엠비시>가 국제화한 ‘K-혐오’는 이처럼 온라인 커뮤니티의 지역혐오, 여성혐오의 정동(情動, affect)과 긴밀히 접속하고 있다.
당신은 아직도 ‘돼지국밥 따위가 대체 뭐라고 난리냐’라고 생각하는가.
부산을 찾은 야권의 대선주자와 지역구 국회의원이 국밥 냄새를 ‘참아가며’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물론 얼굴이었을 테다.
이들에 앞서,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야말로 얼굴로부터 흐르는 정치적 효능을 간파했던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트럼프에게는 인터뷰 방송 녹화를 마치고 스튜디오에 앉아 음소거를 한 채로 재생된 내용을 시청하는 버릇이 있었다.
언어가 아니라 얼굴로부터 흐르는 정치적 효능에 대한 트럼프의 예민한 감수성을 시사한다.
2016년, 트럼프는 이미지의 탈취가 아니라 미리 주어진 이미지를 체현하는 방식으로 대통령 선거에 임했고, 그 전략은 주효했다.
트럼프가 미디어 앞에서 연출한 얼굴은 ‘대안 우파’를 자칭한
커뮤니티 사이트 포챈(4chan) 유저들의 밈으로 전유된 만화 속 개구리 ‘페페’의 표정과 제스처를 꼭 닮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우스개로부터 비롯된 가상계의 선동은 트럼프를 매개로 삼아 현실을 장악했고,
이민자와 페미니스트를 향한 온라인의 혐오 발화는 끝내 총기 난사로 번졌다.
이 참극에 대해 커뮤니티는 ‘승리’를 외치며 열광했고, 페페의 밈에는 트럼프 특유의 헤어스타일이 적용되었다.
현실과 가상이 서로를 포섭하는 세계.
트럼프가 이렇게 구축한 메타버스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혐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밈의 정동은 ‘월드 와이드 웹’을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오히려 특정 대상을 겨냥하여 또는 국지적인 영역을 점거하고 식민화하는 방식으로 거점을 늘려가며 전면화된다.
그 거점이 바로 지역의 몸들이다.
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결과만 양산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지역을 들여다봐야 한다.
밈을 통한 혐오에 침탈당하면서도, 이에 맞서 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장소 또한 바로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역과 그 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는 밈을 경유하면서 점차 거세졌지만,
이에 맞서는 소리는 과소평가되거나 잘 들리지 않았을 뿐,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니다.
몇몇 정치인들이 메타버스에 올라타기에 앞서,
많은 시민과 활동가들은 ‘평등버스’에 올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며 전국 각 지역을 순회했다.
2020년 8월, 이 버스가 공식적으로 출발한 곳은 서울의 국회 앞이었지만
사실상 부산의 영도가 실질적 출발지였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평등버스를 움직인 것은 2011년 영도의 희망버스라는 대안에 응축된 힘이었다.
희망버스 운동은 퀴어버스의 지지 방문과 함께 이루어졌다.
노동자에 대한 응원임과 동시에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취약한 몸들의 연대는 서로의 차이를 구별이 아닌 결속할 수 있는 조건으로 삼는다.
개별 주체의 감응도와 감수성을 ‘공감’으로 엮어내며 근접과 거리의 차이를 지우는
이 초월세계는 버스라는 모바일 플랫폼을 적정기술로서 활용한다.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으로부터 김진숙을 땅에 내린 것은 또 다른 모바일 플랫폼 트위터였다.
에스엔에스(SNS)를 중심으로 번져나간 골리앗 크레인의 밈은 아슬아슬한 허공으로부터 길을 냈고,
그 길에서 버스는 산업자본주의적 영토를 횡단하던 것과는 다른 식의 운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길에 따라 지도화되는 새로운 세계는 각종 차별의 이슈와 함께 물리적 신체와 공간,
담론 생산과 실천의 현장을 교차시키는 또 다른 메타버스다.
이곳을 누비는 희망버스는 다시 한번 평등버스로 변신함으로써 그 자체가 대합실로서,
누군가에게는 대피소이자 누군가에게는 광장이 되어 돌봄과 공론장의 인터페이스를 마련한다.
종이 버스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 에스엔에스로 평등버스를 쫓는 사람들 모두가 탑승자다.
이들 간 경계는 관계로 재편되고, 대안적 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주어는 끊임없이 재형성되는 ‘낯선 우리’가 차지한다.
이런 식으로 버스의 밈은 참조와 반복을 통해 밈이 가진 비인칭적 특성을 새로운 정치적 잠재성으로 사유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희망버스가 전국을 돌거나, 김진숙이 ‘희망뚜벅이’의 걸음으로 청와대까지 갈 때는 사람들의 관심과 함께
에스엔에스를 중심으로 김진숙의 밈도 함께 폭발했다.
한편으로는 희망버스가 전국을 돌지 않을 때, 김진숙의 도보가 끝난 뒤, 이런 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뜨거운 ‘밈의 연대’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진지하게 되짚어진 바 없다.
오늘도 부산 영도에서는 김진숙의 복직을 위한 투쟁이 진행 중이다.
지역 뉴스에조차 보도되지 않지만, 이 투쟁에 참여하는 지역 사람들에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계속 싸우고 있는 몸들이 바로 지역에 있기에 희망버스도, 평등버스도, 에스엔에스의 지지 밈도 가능해진다.
지역은 지금 부대낌으로 밈의 정동적 물줄기를 바꾸어내고 있다.
여기서 내가 반도의 제2도시를 일자리로 삼은 이주민인지, 돼지국밥을 즐겨 먹는 원주민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노동의 권리와 생명의 돌봄을 외치며 청와대로 행진을 시작한 원주 국민건강보험센터 필수노동자들에게 감응하는 것으로도,
나는 씁쓸한 뒷맛을 잊고 살된 존재(fleshy being)로서의 지역과 기꺼이 섞일 수 있다.
원문보기 :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1007155.html
한반의 반도_16
오늘 부산에서 먹은 돼지국밥의 맛을 “뒷맛이 쓰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 부산의 이미지를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환원해버린 차별적 지리 감각에 대해 뒷맛이 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부산을 찾은 야권의 대선주자는 지역 주민을 대접한답시고 지역 소주 ‘대선’을 홀짝이며 바로 돼지국밥을 낮술의 안주로 삼았다.
‘한철 손님’ 덕분에, 나는 돼지국밥을 즐기는 원주민의 몸이 된다.
‘원주민’이라는 말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그 울타리는 지역이라는 경계뿐만 아니라,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비물질적 경계를 함께 드러낸다.
맛과 냄새는 지역에 ‘취향 공동체’의 울타리를 세우는 동시에, 감각하는 몸을 활성화하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울타리를 없앤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맛과 냄새를 내장한 ‘밈’이 ‘혐오’와 함께 지역의 울타리 안으로 쏟아진다.
밈은 원래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 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 단위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단위 가운데 하나가 맛과 냄새를 통해 감각되는 정보로서의 음식이다.
예컨대, 부산을 지칭하는 경멸적 밈 가운데 하나인 ‘스까국’은 무엇이든 섞어 먹는,
아니, ‘스까 묵는’ 괴이한 신진대사의 몸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나라라는 뜻으로,
사투리를 동원해 지역을 괴식으로 수렴하면서 미각과 후각을 즉각적으로 촉발한다.
벤 하이모어가 밝혔듯,
서구사상에서 ‘맛’과 냄새는 취향 또는 안목을 저급화하고 혐오감을 불러들이는 매개로 쓰였다.
땅에서 나서 몸의 내부에 편성되는 음식은 몸과 땅을 동시에 야만화하는 수단이 된다.
평생 관심도 없던 지방과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한철 관심을 표명하는 언사가 유독 음식을 매개로 드러나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야만화 속에서 음식은 코먼스로서의 공통성을 약탈당하고 ‘향토’의 표상과 ‘구빈원’의 시혜 품목이 된다.
누군가가 말아먹은, 누구나가 말아먹는 돼지국밥에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스까국’의 밈이 짙은 농도로 섞여 있다.
참새 시리즈에서 인터넷 밈까지, 밈을 사용하면서 누구나 자신이 ‘유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꾸로 밈이 주인 자리를 꿰차는 일도 빈번하다.
이 원리는 차별적 밈에 대응할 때조차 딜레마로 작동한다.
방역수칙을 가뿐히 망각한 보수 정치인들을 들러리 세웠을 뿐,
‘비수도권’에서 벌어진 대낮의 술판은 사실상 지역 차별의 밈이 가동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작 돼지국밥 정도가 무슨’ 또는 ‘겨우 밈 따위가 무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웃고 즐기자고,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각국을 방사능의 땅, 인플레이션의 땅,
괴물과 폭도들의 땅으로 소개하며 화면 곳곳에 촘촘히 혐오를 새겨넣은 <엠비시>(MBC) 또한 마찬가지다.
이 어처구니없는 작태는 사실상 관습의 인용이라 할 만하다.
그 관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어 흘러들었는지 한국의 남성들은 곧바로 명쾌한 답을 들려주었다.
이들은 한국 여성 금메달리스트의 헤어스타일이 ‘숏컷’이니 페미니스트일 것이라 단정했고 사이버불링을 자행했다.
<엠비시>가 국제화한 ‘K-혐오’는 이처럼 온라인 커뮤니티의 지역혐오, 여성혐오의 정동(情動, affect)과 긴밀히 접속하고 있다.
당신은 아직도 ‘돼지국밥 따위가 대체 뭐라고 난리냐’라고 생각하는가.
부산을 찾은 야권의 대선주자와 지역구 국회의원이 국밥 냄새를 ‘참아가며’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물론 얼굴이었을 테다.
이들에 앞서,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야말로 얼굴로부터 흐르는 정치적 효능을 간파했던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트럼프에게는 인터뷰 방송 녹화를 마치고 스튜디오에 앉아 음소거를 한 채로 재생된 내용을 시청하는 버릇이 있었다.
언어가 아니라 얼굴로부터 흐르는 정치적 효능에 대한 트럼프의 예민한 감수성을 시사한다.
2016년, 트럼프는 이미지의 탈취가 아니라 미리 주어진 이미지를 체현하는 방식으로 대통령 선거에 임했고, 그 전략은 주효했다.
트럼프가 미디어 앞에서 연출한 얼굴은 ‘대안 우파’를 자칭한
커뮤니티 사이트 포챈(4chan) 유저들의 밈으로 전유된 만화 속 개구리 ‘페페’의 표정과 제스처를 꼭 닮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우스개로부터 비롯된 가상계의 선동은 트럼프를 매개로 삼아 현실을 장악했고,
이민자와 페미니스트를 향한 온라인의 혐오 발화는 끝내 총기 난사로 번졌다.
이 참극에 대해 커뮤니티는 ‘승리’를 외치며 열광했고, 페페의 밈에는 트럼프 특유의 헤어스타일이 적용되었다.
현실과 가상이 서로를 포섭하는 세계.
트럼프가 이렇게 구축한 메타버스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혐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밈의 정동은 ‘월드 와이드 웹’을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오히려 특정 대상을 겨냥하여 또는 국지적인 영역을 점거하고 식민화하는 방식으로 거점을 늘려가며 전면화된다.
그 거점이 바로 지역의 몸들이다.
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결과만 양산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지역을 들여다봐야 한다.
밈을 통한 혐오에 침탈당하면서도, 이에 맞서 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장소 또한 바로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역과 그 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는 밈을 경유하면서 점차 거세졌지만,
이에 맞서는 소리는 과소평가되거나 잘 들리지 않았을 뿐,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니다.
몇몇 정치인들이 메타버스에 올라타기에 앞서,
많은 시민과 활동가들은 ‘평등버스’에 올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며 전국 각 지역을 순회했다.
2020년 8월, 이 버스가 공식적으로 출발한 곳은 서울의 국회 앞이었지만
사실상 부산의 영도가 실질적 출발지였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평등버스를 움직인 것은 2011년 영도의 희망버스라는 대안에 응축된 힘이었다.
희망버스 운동은 퀴어버스의 지지 방문과 함께 이루어졌다.
노동자에 대한 응원임과 동시에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취약한 몸들의 연대는 서로의 차이를 구별이 아닌 결속할 수 있는 조건으로 삼는다.
개별 주체의 감응도와 감수성을 ‘공감’으로 엮어내며 근접과 거리의 차이를 지우는
이 초월세계는 버스라는 모바일 플랫폼을 적정기술로서 활용한다.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으로부터 김진숙을 땅에 내린 것은 또 다른 모바일 플랫폼 트위터였다.
에스엔에스(SNS)를 중심으로 번져나간 골리앗 크레인의 밈은 아슬아슬한 허공으로부터 길을 냈고,
그 길에서 버스는 산업자본주의적 영토를 횡단하던 것과는 다른 식의 운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길에 따라 지도화되는 새로운 세계는 각종 차별의 이슈와 함께 물리적 신체와 공간,
담론 생산과 실천의 현장을 교차시키는 또 다른 메타버스다.
이곳을 누비는 희망버스는 다시 한번 평등버스로 변신함으로써 그 자체가 대합실로서,
누군가에게는 대피소이자 누군가에게는 광장이 되어 돌봄과 공론장의 인터페이스를 마련한다.
종이 버스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 에스엔에스로 평등버스를 쫓는 사람들 모두가 탑승자다.
이들 간 경계는 관계로 재편되고, 대안적 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주어는 끊임없이 재형성되는 ‘낯선 우리’가 차지한다.
이런 식으로 버스의 밈은 참조와 반복을 통해 밈이 가진 비인칭적 특성을 새로운 정치적 잠재성으로 사유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희망버스가 전국을 돌거나, 김진숙이 ‘희망뚜벅이’의 걸음으로 청와대까지 갈 때는 사람들의 관심과 함께
에스엔에스를 중심으로 김진숙의 밈도 함께 폭발했다.
한편으로는 희망버스가 전국을 돌지 않을 때, 김진숙의 도보가 끝난 뒤, 이런 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뜨거운 ‘밈의 연대’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진지하게 되짚어진 바 없다.
오늘도 부산 영도에서는 김진숙의 복직을 위한 투쟁이 진행 중이다.
지역 뉴스에조차 보도되지 않지만, 이 투쟁에 참여하는 지역 사람들에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계속 싸우고 있는 몸들이 바로 지역에 있기에 희망버스도, 평등버스도, 에스엔에스의 지지 밈도 가능해진다.
지역은 지금 부대낌으로 밈의 정동적 물줄기를 바꾸어내고 있다.
여기서 내가 반도의 제2도시를 일자리로 삼은 이주민인지, 돼지국밥을 즐겨 먹는 원주민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노동의 권리와 생명의 돌봄을 외치며 청와대로 행진을 시작한 원주 국민건강보험센터 필수노동자들에게 감응하는 것으로도,
나는 씁쓸한 뒷맛을 잊고 살된 존재(fleshy being)로서의 지역과 기꺼이 섞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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