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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der and Affect Studies

활동

[후기] 2020년 11월 24일 젠더·어펙트스쿨 세미나 (권두현)

젠더어펙트연구소
2020-11-30
조회수 241


해외입양인의 몸에 입혀진 정동적 레이어들에 관하여

- 인터내셔널 젠더·어펙트스쿨 후기


권 두 현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1. 사유리와 동백이로 표상되지 않는 비혼모들


“사유리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한국에 떨어졌다.

여기는 ‘아버지’가 없는 출산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그런 곳이다.

물론 그 ‘아버지’는 은행에 보관된 정자 같은 미미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이라는 권위적 존재다.

그래서 사유리가 쏘아올린 그 공은 아버지의 존엄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다.

존엄한 아버지들은 ‘작은 공’에 적잖이 아파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유리가 낳은 작은 아이와 작은 아이의 엄마 사유리,

그리고 수많은 사유리‘들’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바 없다.


사유리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비혼 출산’은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출산 그 자체가 아니라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다.

선택지를 빼앗긴 채 이루어진 비혼 출산의 사례들은 ‘동백이’와 ‘필구’의 경우를 비롯해, 현실에도 무수하다.

비혼모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에는 어떤 사회적 등식이 작동하고 있는데, 비혼모의 아이들은 곧 해외입양의 길에 오른다는 것이다.

한국의 비혼모 시설의 역사는 1926년의 (기독교적 생명 존중 사상에 입각한) 구세군 여자관으로부터 비롯되어,

입양기관이 비혼모 시설을 설립하고,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시설화’ 단계를 밟는다.

이러한 시설화의 기반이 몇몇 입양기관들이 아니라, 공고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김호수, 「해외입양과 미혼모, 그리고 한국의 정상가족」, 장애공감여성 편, 󰡔시설사회󰡕, 와온, 2020. 참고.)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존엄한 아버지를 향한 작은 공은 비단 사유리만이 아니라,

무수한 비혼모들과 해외입양아들로부터 이미 오래 전에 발사되었다고 해야 옳다.

다만, 대부분의 비혼모들은 사유리와는 달리, 자기 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바로 이들 옆에 (하지만 멀리) 해외입양인이 있다. 해외입양은 결정권을 지니지 못한 주체에게 주어진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다.


2. 해외입양인의 심상지리 또는 젠더지리


해외입양인에 관한 김이진의 이번 발표는 영화와 소설로 함께 소개된 <피부색깔=꿀색>을 중심으로

해외입양인을 재현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함께 주목한다.

김이진의 주목과 함께, 작가 융 헤넨(Jung Henin, 한국명 전정식)의 자기서사에 해당하는 <피부색깔=꿀색>은

해외입양인을 중심에 둔 정동적 지도로서 다시 한 번 드러난다.


김이진은 겹눈의 관점에서 해외입양제도의 역사와 표상의 역사를 함께 검토하며, 이를 겹쳐 보인다.

김이진은 토비아스 휘비네트(Tobias Hubinette)를 참조하면서

“언론에서는 성공한 유명한 입양인에 대한 엘리트주의적인 관심이 주로 나타나는 한편,

대중문화작품의 대다수는 국제 입양인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점이 대조적”임을 지적한다.

(사유리에 의해 ‘비로소’ 비혼 출산이 담론화된 논리도 마치 이와 같다.)

이어서, 1989년에 다큐멘터리로 먼저 소개되고, 이에 기반한 영화로 제작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부터

2000년대 이후의 <마이 파더>(2007), <국가대표>(2008), <바비>(2012) 등을 통해 해외입양인 표상의 흐름을 점검한다.

그 흐름은 수잔 브링크의 ‘비애’로부터 다양한 질감으로 변주되며 이어진다.

흐름을 담는 김이진의 시야는 표상‘된’ 대상을 넘어 표상‘하는’ 주체로까지 나아가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에 소개된 해외입양인 감독의 영화로서

<여행자>(2009), <피부색깔=꿀색>(2014), <트윈시스터즈>(2015)를 다시 한 번 소개하며, 특히 <피부색깔=꿀색>에 초점을 맞춘다.

김이진은 서사주체 ‘융’을 넘어 융이 바라보는 한국, 일본, 그리고 아시아를 다시 한 번 시야에 담는다.

김이진은 서양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향하는 융의 시선을 통해, 해외입양인의 송출국인 한국과 수용국인 벨기에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라는 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해외입양인의 시좌를 확인해 보인다.


김이진에 따르면, 융에게 있어 한국과 일본은 겹쳐지는 동시에 어긋나면서, 아시아라는 단층적인 심상지리지 위에 배치된다.

권영빈의 토론은 이러한 융의 심상지리지를 젠더지리지로 번역해보려는 시도로서 이루어졌다.

권영빈은 <피부색깔=꿀색>의 서사주체인 융이 생부에 대한 궁금증과 상상을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고,

양부와의 관계 또한 색다른 지점을 보여주지는 않는 대신, 생모와 양모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축임에 주목한다.

해외입양인에게 ‘엄마’란, 엄마도, 자기 자신도 ‘정체불명’이라는 점에서 주체에게 무규정적 혹은 혼종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이자,

그 자체가 생부와는 다르게 끝없는 상념의 대상, 형성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민희는 정동으로부터 소외된 상태, 차별을 겪는 상황이 ‘문제아’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때,

융이 ‘일본인’ 되기를 자처하는 장면에 주목하면서, 일본인 ‘되기’가 일본이라는 국가가 갖는 힘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인 동시에,

이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 역시 있지 않을지를 묻는다.

바로 이 질문과 함께 국적의 취득으로 결코 완수되지 않음은 물론, 흉내 내기로는 끝내 따라잡을 수 없는 ‘되기’의 문제가 대두된다.


일본인의 복장과 몸짓을 흉내 내는 융, ‘매운 맛’을 욕망하며 흰 쌀밥에 타바스코를 뿌려먹는 융,

이렇게 융의 심상지리 또는 (‘모국’을 상상하며, 또한 발명하고자 하는) 젠더지리는 기본적으로 그의 몸을 지도로 삼아 펼쳐진다.

몸의 생성적 차원에 주목할 때, 김이진이 주목한 해외입양인의 표상은 ‘형상’으로 새롭게 육박한다.

그런 점에서 신민희가 <피부색깔=꿀색>이 포함하는 애니메이션,

다시 말해 융이 그리는 만화가 ‘그리다’라는 감각이라기보다 문지르며 나아가고 있다는

‘촉감(tactile sensibility)’을 느끼게 한다고 평한 부분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촉감은 시각보다도 한층 육화된 반응이기 때문이다.


3. 융이 보는 세계(지도)에서 융의 몸이라는 지도로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기록시스템 1800·1900』(윤원화 역, 문학동네, 2015)

문자에 내포된 음성의 에로스와 함께 부흥한 낭만주의 문학을 가리켜 ‘기록시스템 1800’이라고 명명한다.

이 시스템은 음성학적 읽기 교습법의 미디어로서 알파벳을 가르치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 구축된 것이다.

그런데 ‘축음기, 영화, 타자기’ 같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함께 기록시스템을 이루는 문자와 문학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역, 『축음기, 영화, 타자기』, 문학과지성사, 2019. 참고.)

키틀러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다시 한 번 ‘기록시스템 1900’의 틀 안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김이진과 신민희가 동시에 주목한 작품 내 ‘홈비디오’는

융에게 있어 부재하는 어머니의 입을 대신하는 일종의 기록시스템으로서 입양인의 정신과 신체를 동시에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홈비디오의 장면을 체현한 융의 몸은 기록시스템으로서, 기록 및 기억과 연동하는 정동적 시스템으로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융의 몸에 얽힌 정동은 홈비디오의 ‘젠더 어펙트’ 외에도 여러 겹을 지닌다.

일본 국적자가 아니라, 태생적 일본인이 되고 싶어 일종의 코스프레를 반복하는 융,

‘매운 맛’을 욕망하며 굳이 맨밥에 타바스코를 뿌려 먹다가 기어이 배탈을 앓고 마는 융의 모습은,

융이 가진 의지 또는 의식의 규율을 번번이 벗어나는 신체의 정동적 자율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융이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논의

 필연적으로 ‘수행하는’, ‘체현하는’, ‘각인하는’ 융의 ‘몸’이라는 지도로 옮아가게 된다.

이 지도는 촉각 또는 미각처럼 분할/할당된 ‘오감’이 아니라, ‘정동’에 따라 펼쳐진다.

융의 몸은 이 정동이 내장적 감각(visceral sensibility)으로서 체내에서 발신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체내로 삼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이 정동은 융의 관계적 상상을 통해 비로소 그의 몸과 만난다.

융에게 있어 관계적 자율성은 자연스럽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되기’를 통해 증명해야 하는, 행위주체로서의 몸을 통해 고통스럽게 창안해내야 하는 것이다.


해외입양 문제는 개인, 가족, 국가, 그리고 통국가간 전지구적 구조, 즉 정동적 관계를 동시에 사유해야 하는 난점을 지닌다.

몸을 둘러싼 이러한 중층의 정동적 레이어(막/층/겹/켜)들은 비단 해외입양인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독 해외입양인에게는 여러 겹의 레이어들이 가지런히 포개지지 않으며, 내장되는 대신 다소 어색하게 부착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공통적인 조건과 함께 또 다른 삶의 조건으로서 해외입양인은 ‘부대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대낌 역시 공통적인 조건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면,

우리가 마치 피부처럼 입고 있는 몸의 정동적 레이어들에 대한 좀 더 섬세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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