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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der and Affect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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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2021년 3월 젠더·어펙트스쿨 세미나 (권두현)

젠더어펙트연구소
2021-04-16
조회수 786



아싸’들이 불편한 ‘인싸’들을 위한 문화비평

―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세미나 후기

 

권두현 

 

한국 사회에는 ‘아싸’가 있고, 이들 곁에는 남들이 추는 춤에 ‘챌린지’하며 SNS를 통해 ‘인싸’임을 인증받고자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싸’와의 ‘경계’를 통해 행복한 존재로 걸러진다. 

이와 같은 자아와 타자의 분리 또는 경계가 인문학의 오랜 화두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자신의 철학을 관통하는 근본적 주제이자 관건이 “경계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형상을 증식”시키는 것, “말하자면 선을 증가시키고 증식시킴으로써 

그 선을 복잡하게 하고 두껍게 하고 비선형화”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 다른 논자는 그 경계선을 분리의 표지가 아닌 정향의 벡터로 삼아 재정향을 시도하고자 한다. 

바로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이야기다.


사라 아메드는 󰡔퀴어 현상학(Queer Phenomenology)󰡕에서

 “우리가 욕망의 방향으로 지향하는 ‘무엇’ 또는 ‘누구’의 차이를 만드는가”에 대해 묻는다. 

이 물음은 현상학을 불러온다. 

현상학은 의식이 항상 대상을 향해 있다는 지향성(orientation)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지향성에 대한 아메드의 관심은 ‘행복’과 결합하여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행복은 욕망의 대상으로, 목표로 해야 할 것으로, 우리 삶에 목적이나 의미, 질서를 부여해 주는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되어 왔다. 

아메드는 이와 같은 전제 위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아메드에 따르면 행복은 ‘약속’의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사회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약속(미래의 지연)을 통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약속은 우리를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어떤 대상들로 인도하고, 

좋은 삶을 어떤 대상들에 가까이 가면 얻게 되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오늘날 ‘챌린지’의 몸짓들은 행복한 자들에 다가가기 위한 몸짓, 아니 ‘몸부림’이라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행복을 향한 몸부림은 과연 약속된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 ‘챌린저’들은 행복에 무사히 ‘도착’했을지, 

그 몸부림은 디오니소스적인 ‘몰아’에 따른 것인지, ‘아싸’는 알 길이 없다. 

행복을 목표로 삼은 챌린저들의 반복되는 몸짓은 ‘귀멸’을 목표로 칼날을 휘두르는 불행한 주체, 

카마도 탄지로의 몸짓과도 닮아 있는 듯 보인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유포테이블(ufotable)은 이 몰아의 몸짓을 ‘전집중 물의 호흡’처럼 유려하고 웅장하게 연출해냈고, 

수많은 관객들이 이 몸짓에 압도되어 카타르시스를 체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몰아의 경지에 이른 카타르시스일지, 시청각 포르노 코드에 의한 오르가즘은 아닐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몰입은 모방되고, 매개되며, 상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감안한다면, 몰입 상태가 아닌 ‘불행한’ 주체들이 만나는 세상은 이들에게 적대적이고, 

세상은 이들의 행동을 가능케 하기보다는 차단한다. 

그래서 불행한 주체들은 세상을 이질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사라 아메드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신체와 세상의 친밀성에 기초한 행복의 현상학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한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역사에서 추방된 사람들, 

단지 ‘분위기 깨는 자’로서만 그 역사에 진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고려함으로써 대안적인 행복의 역사를 제시한다. 

그 역사 속에서 분위기 깨는 자는 ‘페미니스트’(2장), ‘퀴어’(3장), ‘이주자’(4장)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사라 아메드가 이들의 형상을 확인하는 작품의 목록은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과 <디 아워스(The Hours)>, 

󰡔고독의 우물(The Well of Loneliness)󰡕과 <길 잃은 천사들(Lost and Delirious)>, 

<베컴처럼 휘어 차기(Bend It Like Beckham)>와 󰡔아니타와 나(Anita and Me)󰡕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 작품을 통해 아메드는 문화비평에 있어 정동(affect)이라는 관점의 유효성을 그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입증해낸다. 

예컨대,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불행이 생명을 얻게 되는 정동적 전환의 순간을 포착해 보이는 아메드의 통찰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끝내 불행을 행복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는 기존 행복론의 선형적 전제를 퀴어링하는 셈이다.


사라 아메드는 불행이라는 기원과 행복이라는 목표로 폐쇄회로를 이루는 행복의 약속에 

전제된 ‘지향성’으로부터 탈각하여 ‘우연발생’과 ‘어쩌면’의 논리로 나아간다. 

방향의 상실은 자유의 확보라고 달리 사유될 수 있다.

 󰡔행복의 약속󰡕은 그 자유를 ‘불행할 자유’라 말한다. 

이는 우리 자신이 비참해지거나 슬퍼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불행에 의해 정동될(affected) 자유,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갈 자유, 행복을 종착점으로 보지 않고 행복의 길에서 이탈한 삶을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란 단지 ‘인싸’와 ‘아싸’의 갈림길에서 주어진 ‘아싸’의 길을 선택하는 것, 

“행복한 자들의 세상”에서 “불행한 주체”로 살아가는 것일 수 없다. 

선택의 필연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사유하며, 이를 확대하는 것, 그것이 아메드의 혁명적 정치학에 의해 정동되는 길이다. 

그 길은 행복과의 만남이 아니라, 불행과의 마주침에 열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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