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9월 1일)는 2020년 2학기 개강일이었고,
젠더·어펙트연구소의 “연결신체 이론과 젠더·어펙트 연구” 사업 2차년도의 개시와 함께,
젠더·어펙트스쿨 제3기가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 출발한 날이었다.
세미나가 진행된 곳은 ZOOM이라는 가상공간이었지만
-‘에어팟’과 ‘아이폰’을 통해 화상회의실에 접속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기기의 ‘충전’이 필요했다.
이 전기는 어디에서 왔을까-나의 물리적 신체는 연구소가 있는 하단동에 머물러 있었다.
하단동(下端洞)은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 강서구 명지동과 마주 보고 있는 곳으로 1300리 낙동강의 끝자락이란 의미다.
하단은 그 지명 안에 ‘강’의 ‘흐름’을 품고 있다.
‘강’의 흐름은 ‘물’의 흐름 그 이상을 의미한다. 낙동강은 퇴적토로서의 ‘모래’와 ‘진흙’을 운반한다.
하단동이 위치한 ‘사하구(沙下區)’라는 지명은 이를 보여준다. 사하구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낙동강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장이다.
강을 따라 운반된 모래와 진흙이 바다 쪽에 쌓이면서 삼각주를 이룬 곳이 바로 사하구이다.
사하구는 모래 위에 세워진 도시다. 객체 지향 존재론자에게 깨달음을 선사했던 <심시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하구를 품은 부산을 수식하는 단어는 ‘다이나믹(Dynamic)’이다. 다이나믹은 다시 ‘파도’의 아이콘으로 ‘부산’ 위에 배치된다.
‘다이나믹 부산’에 산다는 것은 도시와 자연의 ‘배치’와 그 뒤얽힘을 체화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살된 존재(fleshy beings)’로서의 부산은 도시가 생기론적임을 잘 알려주는 장소인 것 같다.
태풍이 올 때마다 생기론적 도시는 그 존재의 신호를 뚜렷하게 발신한다.
서울에서 태풍은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의 태풍은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단순한 통행의 불편함 그 이상의 의미로 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제인 베넷은 <생동하는 물질>에서 카트리나 정전 사태에 주목한 바 있다.
이 소요는 태풍과 전기와 기업이라는 행위주체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사태로서 현현한다.
태풍은 행위주체로서 물질들의 뒤얽힘을 실현하고 가시화한다. 무엇이 어떻게 뒤얽히는가.
비와 바람, 파도와 육지, 자연과 사회 등이다.
이분법적으로 구획된 범주들뿐만이 아니라, 정치-생태/생태-정치의 장이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파헤쳐지고 새롭게 일궈진다.
그런 점에서 태풍이라는 ‘사건’은 물질의 경계가 그것의 외피와 같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예측불가능성의 기호이자 물질(의 흐름) 그 자체로서의 태풍 앞에서 인간은 비인간들의 ‘회집체(assemblage)’ 바깥에 물러나 있는(물러나야만 하는) 것일까.
태풍은 당연하게도 인간을 그 안에 끌어들인다. 물질적-자연적이며, 동시에 관계적-사회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와 같은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상륙한 태풍은 기호이자 물질로서 동시에 작용하는 (레비 브라이언트식의) 기계로서 인간들의,
신체들의 연결과 의존을 완수하는, 고장난 것 같은 삶을 다시 한 번 작동시키는 매체다.
런 점에서 태풍의 강도와 밀도는 정동적 강도와 밀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공성의 신체가 받아들이는 것이 물질만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동과 같은) 비물질 역시 신체라는 물질을 변화시키고 역능을 창발할 수 있다. 물질과 비물질을 횡단하며,
관계하는 존재자들의 구조와 배치에 대한 사유, 이것이 정치가 아니면 무엇일까.
신유물론에 대해 ‘정치적’ ‘인간 주체들’을 손쉽게 지워버리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곳곳에서 접하게 된다.
태풍을 지우고 인간을 사유하는 일, 강과 바다와 모래를 지우고 부산의 일상과 노동을 상상하는 일은 (탈정치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이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원제는 “海よりもまだ深く”, 즉 “바다보다도 더 깊은”이라는 뜻이 되겠다.
또 다른 ‘바다 영화’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바다 빼고’ 이야기해도 과연 괜찮은 것인가.)

어제(9월 1일)는 2020년 2학기 개강일이었고,
젠더·어펙트연구소의 “연결신체 이론과 젠더·어펙트 연구” 사업 2차년도의 개시와 함께,
젠더·어펙트스쿨 제3기가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 출발한 날이었다.
세미나가 진행된 곳은 ZOOM이라는 가상공간이었지만
-‘에어팟’과 ‘아이폰’을 통해 화상회의실에 접속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기기의 ‘충전’이 필요했다.
이 전기는 어디에서 왔을까-나의 물리적 신체는 연구소가 있는 하단동에 머물러 있었다.
하단동(下端洞)은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 강서구 명지동과 마주 보고 있는 곳으로 1300리 낙동강의 끝자락이란 의미다.
하단은 그 지명 안에 ‘강’의 ‘흐름’을 품고 있다.
‘강’의 흐름은 ‘물’의 흐름 그 이상을 의미한다. 낙동강은 퇴적토로서의 ‘모래’와 ‘진흙’을 운반한다.
하단동이 위치한 ‘사하구(沙下區)’라는 지명은 이를 보여준다. 사하구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낙동강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장이다.
강을 따라 운반된 모래와 진흙이 바다 쪽에 쌓이면서 삼각주를 이룬 곳이 바로 사하구이다.
사하구는 모래 위에 세워진 도시다. 객체 지향 존재론자에게 깨달음을 선사했던 <심시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하구를 품은 부산을 수식하는 단어는 ‘다이나믹(Dynamic)’이다. 다이나믹은 다시 ‘파도’의 아이콘으로 ‘부산’ 위에 배치된다.
‘다이나믹 부산’에 산다는 것은 도시와 자연의 ‘배치’와 그 뒤얽힘을 체화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살된 존재(fleshy beings)’로서의 부산은 도시가 생기론적임을 잘 알려주는 장소인 것 같다.
태풍이 올 때마다 생기론적 도시는 그 존재의 신호를 뚜렷하게 발신한다.
서울에서 태풍은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의 태풍은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단순한 통행의 불편함 그 이상의 의미로 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제인 베넷은 <생동하는 물질>에서 카트리나 정전 사태에 주목한 바 있다.
이 소요는 태풍과 전기와 기업이라는 행위주체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사태로서 현현한다.
태풍은 행위주체로서 물질들의 뒤얽힘을 실현하고 가시화한다. 무엇이 어떻게 뒤얽히는가.
비와 바람, 파도와 육지, 자연과 사회 등이다.
이분법적으로 구획된 범주들뿐만이 아니라, 정치-생태/생태-정치의 장이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파헤쳐지고 새롭게 일궈진다.
그런 점에서 태풍이라는 ‘사건’은 물질의 경계가 그것의 외피와 같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예측불가능성의 기호이자 물질(의 흐름) 그 자체로서의 태풍 앞에서 인간은 비인간들의 ‘회집체(assemblage)’ 바깥에 물러나 있는(물러나야만 하는) 것일까.
태풍은 당연하게도 인간을 그 안에 끌어들인다. 물질적-자연적이며, 동시에 관계적-사회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와 같은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상륙한 태풍은 기호이자 물질로서 동시에 작용하는 (레비 브라이언트식의) 기계로서 인간들의,
신체들의 연결과 의존을 완수하는, 고장난 것 같은 삶을 다시 한 번 작동시키는 매체다.
런 점에서 태풍의 강도와 밀도는 정동적 강도와 밀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공성의 신체가 받아들이는 것이 물질만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동과 같은) 비물질 역시 신체라는 물질을 변화시키고 역능을 창발할 수 있다. 물질과 비물질을 횡단하며,
관계하는 존재자들의 구조와 배치에 대한 사유, 이것이 정치가 아니면 무엇일까.
신유물론에 대해 ‘정치적’ ‘인간 주체들’을 손쉽게 지워버리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곳곳에서 접하게 된다.
태풍을 지우고 인간을 사유하는 일, 강과 바다와 모래를 지우고 부산의 일상과 노동을 상상하는 일은 (탈정치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이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원제는 “海よりもまだ深く”, 즉 “바다보다도 더 깊은”이라는 뜻이 되겠다.
또 다른 ‘바다 영화’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바다 빼고’ 이야기해도 과연 괜찮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