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지 1. 플라스틱 월드: 을숙도
서울은 만원이다. 덕분에, K(케이)는 국경을 떠돈다. 파주 봉일천에서 부산 괴정천까지 사백이십칠 킬로미터.
‘판문점 주유소’를 경유해야 하는 국경도시에 살던 K는 거기가 ‘끝’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 그곳에는 사방에 산이 없어 대지의 끝을 가늠할 수 없다.
K는 작년부터 다른 쪽 ‘끝’이라 하는 곳을 걷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끝은 안 나오니, <밀다원 시대>에서 부산을 끝으로 한정했던 김동리는 냉전 체제의 지리 감각을 철저히 몸에 익힌 게 분명하다.
K는 남진하는 북한 전차를 막기 위해 도로 양옆에 설치했던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일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잠시 휩싸였다가,
이내 여기가 ‘던전’이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본다.
바다 내음이 물큰한 여기는 하단, 그러니까 낙동강 하구다.
그런데 펼쳐진 전경은 코끝에 닿은 것이 바다 내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일러준다.
낙동강과 합류하는 괴정천에 떠 있는 스티로폼과 페트병.
이 플라스틱들을 ‘국경’ 파주의 봉일천에서도 이미 보았던 탓에, K는 플라스틱 더미 속을 헤엄치고 있다고 때로 감각한다.
괴정천을 둘러싼 철제 난간에는 ‘악취 및 수질개선 사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부착되어 있다.
국경과 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이자, 신체와 강력히 결부된 흔적이기도 한 것이 바로 냄새다.
<기생충>이 계급적 냄새가 펼쳐지는 드라마였다면, 남단에 이르러 맡은 이 냄새는 지역의 드라마 가운데 한 페이지일 것이다.
괴정천이 흐르는 사하구의 공약이 ‘24시간 숨쉬기 편한 도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여기가 숨쉬기 어려운 도시였음을 눈치챈다.
숨막힘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지역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공통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K는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천삼백리 낙동강 물길을 돌아온 골칫거리를 악취와 함께 몸에 들이며 조금 늦게나마 ‘사하구민’이 된다.
괴정천에는 쓰레기가 떠 있고, 을숙도에는 쓰레기와 더불어 분뇨가 매립되어 있다.
‘모래톱 이야기’를 품은 사하(沙下)의 지층은 계속 두터워지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발을 디디면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뚫고 오물에 푹 잠길 것만 같다.
노변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의 근거를 문득 깨달은 K는 그 적층의 표면을 조심스레 밟아나간다.
#스테이지 2. 리뉴얼 시티: 중앙동
악취를 뒤로하고 도착한 중앙동의 공기는 무취하다. 중앙동은 인근의 부산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산의 원도심이다.
K는 도시의 공기 속을 유영하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멈추고, 낮은 목소리의 중얼거림을 엿듣는다.
그들은 지도에 새겨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야기는 부산에 도착한 광주의 5·18에 의해 촉발된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이를 모티프로 삼은 박솔뫼의 소설을 시작으로,
지근거리에서 벌어졌던 부산역전과 국제시장의 대화재 사건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한 곳에서 좌초한다. 재개발 붐.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의 재개발이 투쟁과 이념의 횃불로 타올랐던 이곳의 역사를 매끄럽게 대체했음을, K는 공사 중인 건물들 사이에서 느낀다.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곳곳의 바리케이드는 ‘원도심’의 이름이 끊임없는 개발의 역사 속에서 호명된 것임을 알려준다.
중앙동의 바람은 자본의 흐름을 좇아 파헤쳐진 도심 사이를 쉼 없이 몰려다닌다.
미문화원의 역사, 이 역사에 관한 소설, 그 소설에 관한 설화는 도시 개발의 바람에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순간, 도시의 숨이라고 느꼈을 이 바람은 애초에 부산을 반도의 ‘제2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외부의 입김으로, 도시의 자가호흡과는 다른 것이다.
일제강점과 해방, 그리고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던 백 년 동안 백 배에 가깝게 폭증한 부산의 인구는 현재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이곳에 다시 한번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은 비엔날레와 엑스포와 같은 메가 이벤트다.
‘재개발’과 ‘대개조’의 현수막과 함께 ‘문화회복’의 깃발이 격렬하게 나부끼고 있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가 적층된 이 장소는 매끈한 표면으로 포장될 것이고,
도시인은 그 표면을 편안하게 활보하며, 우뚝 솟은 부산타워를 일견 무심히 바라볼 것이다.
저 멀리, 부산타워를 바라보던 K는 문득 바람에 섞인 녹슨 철근의 냄새를 느낀다.
#스테이지 3. 러스트 빌리지: 영도
중앙동의 바람은 부산항과 통한다.
그 바람은 영도대교 아래의 파도를 밀어 올려 ‘부산스러움’이라고 통상적으로 알려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영도는 1937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조선소가 위치한 곳이다. 영도 곳곳에는 조선소와 노후선박들이 즐비하다.
강선(鋼船)의 위용을 기대했던 K는 이곳에서 붉은 배를 본다.
수평선 위의 붉은 배가 아니라, 물양장에 붙들려 파도와 함께 출렁이는 녹슨 배들이다.
녹슮, 바람과 파도가 강철에 부딪힌 흔적. 그것은 오염, 훼손, 부식이 아니라 조우, 작용, 생성이다.
그 녹은 홑겹이 아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녹슨 배들의 내밀한 이력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주기적으로 녹슬어 버리는 이 배에 달라붙어 녹을 떨어내야 했던 ‘깡깡이 아지매’들의 대다수는 피난민의 후예이거나 농어촌을 떠나온 실향민들이었다.
김언수는 ‘깡깡’ 철판을 때리는 소리로 시작하는 소설을 썼고, 영도의 비엔날레는 부산이 수많은 ‘부산들’로,
영도가 수많은 ‘영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듯이 선박의 부품들을 해체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것이 영도의 골격, 부산의 골격인 셈이다.
녹슮은 물질들 사이의 골칫거리 내지 부작용만은 아니다.
물질들을 움직이는 사회적 힘과 역사의 겹들이 녹슮이라는 물질성으로 이곳에 있다.
녹슨 배는 ‘사양산업’을 짊어진 ‘지역문제’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역의 오늘을 만든 사회적 힘과 역사의 겹을 담고 있는 물질적 상관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슮은 골치 아픈 지역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가 물질로 현현한 것이다.
녹슨 배를 들여다보며 그 ‘트러블’의 경계가 제한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녹슨 영도는 무쇠를 달구기에 충분했던 경제개발의 열풍이 도착하고 서서히 식어간 자리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영도를 움직인 것은 반도다.
‘반도’ 역시 파주에서 부산까지 수많은 ‘반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도는 영도에 어업의 기능을 할당했을 것이다.
냉전이 열전의 위협과 충격파로 전달되었던 것처럼 반도는 또한 세계와 함께 타오르며 출렁인다.
세계와 반도, 반도와 영도가 주고받는 파도 속에서 녹슬어갔을 이 배들은 이제 후쿠시마의 오염수가 흐르는 바다를 횡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의 깃발이 펄럭이는 낭만적 대상 뒤에는 바다보다도 더 깊은 갈등의 이력이 엄존한다.
이에 따라 풍경은 살된 존재(fleshy being)로서 K의 몸에 충돌하고 뒤얽히다, 마침내 물든다.
#스테이지 4. 로컬 에스에프: 실뜨기의 정치
냄새를 맡고, 바람을 맞았다가, 조금은 녹슨 몸이 되어 K는 돌아온다. 그리고 얻은 것은 오감 너머, 로컬에서 살기 위한 새로운 공통감각이다.
로컬에 산다는 것은 문제와 함께 머무른다는 것이다.
‘문제와 함께 머무르는 것’은 문제가 사라진 미래라고 불리는 시간과의 관계 대신, 문제와 뒤얽혀 현재에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여기’와 ‘저기’가 지도를 제작하듯이 구획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세계의 골칫거리와 우리의 몸이 뒤얽혔을 때, 각자 발 딛고 선 세계의 삶들이 서로 뒤얽혔을 때,
‘로컬 트러블’은 ‘로컬 에스에프’, 즉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을 넘어선 실뜨기(String Figure)로 완수된다.
누군가에게 그저 먼 곳의 에스에프(SF)처럼 취급되는 지역의 문제는 실뜨기를 통해 비로소 서로에게 스치고 마침내 뒤얽힐 것이다.
그 실은 문제를 함께 깁고, 짜고, 누비는 데 분명 쓸모가 있다. 이제 부산에서 반도를 향해, 그 실뜨기를 해보려고 한다.
(* 게임의 플롯 방식을 통해 몸으로 체감한 지역문제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3843.html?fbclid=IwAR1sXU-gmysZh8WelURheZsUFrGAzPOHMGXYyX-706m4n-_QT34fLws8eR8#csidxa2f544623f8a420a3b9cc916fbcd3ae
#스테이지 1. 플라스틱 월드: 을숙도
서울은 만원이다. 덕분에, K(케이)는 국경을 떠돈다. 파주 봉일천에서 부산 괴정천까지 사백이십칠 킬로미터.
‘판문점 주유소’를 경유해야 하는 국경도시에 살던 K는 거기가 ‘끝’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 그곳에는 사방에 산이 없어 대지의 끝을 가늠할 수 없다.
K는 작년부터 다른 쪽 ‘끝’이라 하는 곳을 걷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끝은 안 나오니, <밀다원 시대>에서 부산을 끝으로 한정했던 김동리는 냉전 체제의 지리 감각을 철저히 몸에 익힌 게 분명하다.
K는 남진하는 북한 전차를 막기 위해 도로 양옆에 설치했던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일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잠시 휩싸였다가,
이내 여기가 ‘던전’이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본다.
바다 내음이 물큰한 여기는 하단, 그러니까 낙동강 하구다.
그런데 펼쳐진 전경은 코끝에 닿은 것이 바다 내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일러준다.
낙동강과 합류하는 괴정천에 떠 있는 스티로폼과 페트병.
이 플라스틱들을 ‘국경’ 파주의 봉일천에서도 이미 보았던 탓에, K는 플라스틱 더미 속을 헤엄치고 있다고 때로 감각한다.
괴정천을 둘러싼 철제 난간에는 ‘악취 및 수질개선 사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부착되어 있다.
국경과 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이자, 신체와 강력히 결부된 흔적이기도 한 것이 바로 냄새다.
<기생충>이 계급적 냄새가 펼쳐지는 드라마였다면, 남단에 이르러 맡은 이 냄새는 지역의 드라마 가운데 한 페이지일 것이다.
괴정천이 흐르는 사하구의 공약이 ‘24시간 숨쉬기 편한 도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여기가 숨쉬기 어려운 도시였음을 눈치챈다.
숨막힘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지역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공통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K는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천삼백리 낙동강 물길을 돌아온 골칫거리를 악취와 함께 몸에 들이며 조금 늦게나마 ‘사하구민’이 된다.
괴정천에는 쓰레기가 떠 있고, 을숙도에는 쓰레기와 더불어 분뇨가 매립되어 있다.
‘모래톱 이야기’를 품은 사하(沙下)의 지층은 계속 두터워지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발을 디디면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뚫고 오물에 푹 잠길 것만 같다.
노변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의 근거를 문득 깨달은 K는 그 적층의 표면을 조심스레 밟아나간다.
#스테이지 2. 리뉴얼 시티: 중앙동
악취를 뒤로하고 도착한 중앙동의 공기는 무취하다. 중앙동은 인근의 부산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산의 원도심이다.
K는 도시의 공기 속을 유영하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멈추고, 낮은 목소리의 중얼거림을 엿듣는다.
그들은 지도에 새겨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야기는 부산에 도착한 광주의 5·18에 의해 촉발된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이를 모티프로 삼은 박솔뫼의 소설을 시작으로,
지근거리에서 벌어졌던 부산역전과 국제시장의 대화재 사건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한 곳에서 좌초한다. 재개발 붐.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의 재개발이 투쟁과 이념의 횃불로 타올랐던 이곳의 역사를 매끄럽게 대체했음을, K는 공사 중인 건물들 사이에서 느낀다.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곳곳의 바리케이드는 ‘원도심’의 이름이 끊임없는 개발의 역사 속에서 호명된 것임을 알려준다.
중앙동의 바람은 자본의 흐름을 좇아 파헤쳐진 도심 사이를 쉼 없이 몰려다닌다.
미문화원의 역사, 이 역사에 관한 소설, 그 소설에 관한 설화는 도시 개발의 바람에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순간, 도시의 숨이라고 느꼈을 이 바람은 애초에 부산을 반도의 ‘제2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외부의 입김으로, 도시의 자가호흡과는 다른 것이다.
일제강점과 해방, 그리고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던 백 년 동안 백 배에 가깝게 폭증한 부산의 인구는 현재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이곳에 다시 한번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은 비엔날레와 엑스포와 같은 메가 이벤트다.
‘재개발’과 ‘대개조’의 현수막과 함께 ‘문화회복’의 깃발이 격렬하게 나부끼고 있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가 적층된 이 장소는 매끈한 표면으로 포장될 것이고,
도시인은 그 표면을 편안하게 활보하며, 우뚝 솟은 부산타워를 일견 무심히 바라볼 것이다.
저 멀리, 부산타워를 바라보던 K는 문득 바람에 섞인 녹슨 철근의 냄새를 느낀다.
#스테이지 3. 러스트 빌리지: 영도
중앙동의 바람은 부산항과 통한다.
그 바람은 영도대교 아래의 파도를 밀어 올려 ‘부산스러움’이라고 통상적으로 알려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영도는 1937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조선소가 위치한 곳이다. 영도 곳곳에는 조선소와 노후선박들이 즐비하다.
강선(鋼船)의 위용을 기대했던 K는 이곳에서 붉은 배를 본다.
수평선 위의 붉은 배가 아니라, 물양장에 붙들려 파도와 함께 출렁이는 녹슨 배들이다.
녹슮, 바람과 파도가 강철에 부딪힌 흔적. 그것은 오염, 훼손, 부식이 아니라 조우, 작용, 생성이다.
그 녹은 홑겹이 아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녹슨 배들의 내밀한 이력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주기적으로 녹슬어 버리는 이 배에 달라붙어 녹을 떨어내야 했던 ‘깡깡이 아지매’들의 대다수는 피난민의 후예이거나 농어촌을 떠나온 실향민들이었다.
김언수는 ‘깡깡’ 철판을 때리는 소리로 시작하는 소설을 썼고, 영도의 비엔날레는 부산이 수많은 ‘부산들’로,
영도가 수많은 ‘영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듯이 선박의 부품들을 해체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것이 영도의 골격, 부산의 골격인 셈이다.
녹슮은 물질들 사이의 골칫거리 내지 부작용만은 아니다.
물질들을 움직이는 사회적 힘과 역사의 겹들이 녹슮이라는 물질성으로 이곳에 있다.
녹슨 배는 ‘사양산업’을 짊어진 ‘지역문제’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역의 오늘을 만든 사회적 힘과 역사의 겹을 담고 있는 물질적 상관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슮은 골치 아픈 지역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가 물질로 현현한 것이다.
녹슨 배를 들여다보며 그 ‘트러블’의 경계가 제한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녹슨 영도는 무쇠를 달구기에 충분했던 경제개발의 열풍이 도착하고 서서히 식어간 자리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영도를 움직인 것은 반도다.
‘반도’ 역시 파주에서 부산까지 수많은 ‘반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도는 영도에 어업의 기능을 할당했을 것이다.
냉전이 열전의 위협과 충격파로 전달되었던 것처럼 반도는 또한 세계와 함께 타오르며 출렁인다.
세계와 반도, 반도와 영도가 주고받는 파도 속에서 녹슬어갔을 이 배들은 이제 후쿠시마의 오염수가 흐르는 바다를 횡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의 깃발이 펄럭이는 낭만적 대상 뒤에는 바다보다도 더 깊은 갈등의 이력이 엄존한다.
이에 따라 풍경은 살된 존재(fleshy being)로서 K의 몸에 충돌하고 뒤얽히다, 마침내 물든다.
#스테이지 4. 로컬 에스에프: 실뜨기의 정치
냄새를 맡고, 바람을 맞았다가, 조금은 녹슨 몸이 되어 K는 돌아온다. 그리고 얻은 것은 오감 너머, 로컬에서 살기 위한 새로운 공통감각이다.
로컬에 산다는 것은 문제와 함께 머무른다는 것이다.
‘문제와 함께 머무르는 것’은 문제가 사라진 미래라고 불리는 시간과의 관계 대신, 문제와 뒤얽혀 현재에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여기’와 ‘저기’가 지도를 제작하듯이 구획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세계의 골칫거리와 우리의 몸이 뒤얽혔을 때, 각자 발 딛고 선 세계의 삶들이 서로 뒤얽혔을 때,
‘로컬 트러블’은 ‘로컬 에스에프’, 즉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을 넘어선 실뜨기(String Figure)로 완수된다.
누군가에게 그저 먼 곳의 에스에프(SF)처럼 취급되는 지역의 문제는 실뜨기를 통해 비로소 서로에게 스치고 마침내 뒤얽힐 것이다.
그 실은 문제를 함께 깁고, 짜고, 누비는 데 분명 쓸모가 있다. 이제 부산에서 반도를 향해, 그 실뜨기를 해보려고 한다.
(* 게임의 플롯 방식을 통해 몸으로 체감한 지역문제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3843.html?fbclid=IwAR1sXU-gmysZh8WelURheZsUFrGAzPOHMGXYyX-706m4n-_QT34fLws8eR8#csidxa2f544623f8a420a3b9cc916fbcd3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