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의 반도_10
재개발을 이유로 퇴거 명령을 받고 잔치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부산 남구 대연동 재개발지구에 자리하고 있던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2013년 6월에 퇴거 명령을 받았는데,
‘백수들의 유쾌한 실험실’을 자처했던 이들은 이 ‘재개발’ 통지를 ‘재능(재)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변주해 철거할 때까지
그곳을 주변 친구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 있거나 전시 공간이 필요했던 이들이 그곳으로 모였고,
하루를 즐겁게 놀고 싶은 이들도 날짜를 정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화장실과 다락엔 취미로 그렸던 그림이 전시되었고 생애 첫 라이브 공연을 열기도 했다.
제주 강정으로 보낼 후원금 모금 행사가 있던 다음날엔 파전이나 수박화채를 만들어 먹으며 밤새워 놀았다.
철거 덕분(?)에 한 달간 동네 페스티벌이 열린 것이다.
애초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문턱이 없던 그곳에 도착한 철거 통지서는 작은 마당이 필요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초대장이 되었다.
‘지역의 가능성’이라든가 ‘대안적 삶의 양식’이란 슬로건을 마치 만능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품고 돌아다니다
당도했던 ‘생각다방 산책극장’엔 ‘대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뭔가를 ‘돌파’하거나 ‘극복’하지 않고도 낯선 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그곳에선 누구도 ‘대안’이라는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주로 동네 친구들이 모이는 다방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공동주거를 실험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여행자들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다방에 모인 이들은 어딘가로 멀리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는 이들이었고,
멀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방에 들른 이들이기도 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헤매다가 다방에 도착한 이들이기도 했다.
다방은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고 무엇보다 ‘이상한(queer·퀴어) 관계성’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곳이었다.
다방의 묘한 편안함과 안락함은 집이나 가족과 같은 안정감이나 지속가능함을 전제하지 않는 관계 맺기를 통해 조성한 것이었다.
무질서해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눈엔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감각을 통해
비건으로 생활하기, 지구를 돌보는 생활 양식을 실천하기, 최소한으로만 일하며 살기, 비혼 공동체 만들기와 같은 실험과 실천을 꾸준히 해나갔던 것이다.
각자의 ‘이상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도 좋다는 표지로 가득했던 다방에선
누구도 이를 악물거나 서로를 향해 독기를 내뿜지 않고도 자기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희귀종 같기도 하고 이방인 같기도 했던 이들이 모여 있던 다방은 ‘이상함의 생태’로 조성한 서식지였다.
그 서식지에서 어울렸던 이들은 가난했지만 불안해하지 않았고 하나같이 당당했다.
2013년 여름부터 친구들과 함께 생활예술모임 ‘곳간’이라는 작은 모임을 꾸리고 있다.
이달에도 열릴 예정인 이 모임의 정기 프로그램인 ‘문학의 곳간’은 이제 76회차를 맞이한다.
‘문학의 곳간’도 ‘재능(재)계발 달력’의 하루를 빌려 처음을 열 수 있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쓰임을 잃어버린 ‘곳간’이라는 어휘를 되살려 쓰면서 그곳을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축적의 이름’이 아니라
누구나 들고 나며 각자의 보따리를 마음껏 풀 수 있는 ‘나눔의 이름’으로 변주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한곳에 불러 모으기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찾아가 만나고 사귀는 동안 배우고 익힌 것들이 있다.
특정한 제도나 지역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도 다양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실험해온 크고 작은 모임들이야말로 지역문화 생태계의 보고라는 것,
자생적인 모임의 가장 큰 동력은 서로가 서로의 목격자나 증언자가 되어주는 데 있다는 것,
뜻이 맞는 소수(취향 공동체)여서 모였던 것이 아니라 모임을 통해 각자의 특별함과 이상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취약함이라는 것이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성의 기반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의 곳간’을 찾는 이들은 ‘문청’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혜안이나 전문가적인 안목보단 각자의 이력을 덧대어 작품을 읽어내거나
자신의 생활과 삶을 이야기로 이어보는 것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었다.
누군가의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며 한발 한발 걸음을 떼다 보면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각자의 아픈 세상이 어느새 눈앞에 펼쳐져 있곤 했다.
얼핏 하찮고 못나 보이는 이야기가 귀 기울여 들으려는 사려 깊은 태도를 통해 귀하고 드문 이야기로 변하는
‘문학적인 순간’을 만날 때면 문학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각자의 세계 속에서,
곳곳의 장소에서 여러 개의 모습으로, 매번 다른 표정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의 곳간’엔 정교한 분석 비평보단 엉뚱한 상상이나 헛소리에 가까운 이야기의 힘이 더 세다.
언제나 책의 주제와 연결지어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는데,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었을 땐 ‘나의 짐-반려-취약성-힘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장기투쟁 현장의 목소리를 기록한 희정의 <여기, 우리, 함께>에선 ‘오늘도 싸우고 있는 누군가의 곁에서’라는 주제로,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은 ‘자긍심을 지켜준 모임, 장소, 관계’라는 주제로 자신을 소개해보는 것이다.
책과 매개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건 ‘나’라는 정체성을 보호해왔던 자아의 장벽과 문턱을 낮춰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제도적이거나 관습적인 것에 침윤되어 패턴적으로 읽고 말하는 방식을 반복하기보단
참석자들 각자가 조형해온 삶의 이력으로 비추는 이야기는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일쑤인데,
외려 이 이상한 궤적 덕에 헛발질과 헛손질, 헛고생에 관한 경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곤 했다.
성취한 것의 목록이 아니라 실패한 것, 좌절한 것, 중단한 것, 아무런 성과가 없는 듯 보이기에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
한 번도 목록으로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이 실은 사력을 다해서 잘 해내고 싶었던 것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 실패의 목록 곁에 ‘문학의 곳간’을 열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려 다시 부를 수 없는 장소의 이름을 적어둔다.
장전동의 ‘카페 헤세이티’, 온천동의 ‘책방 숲’, 부산교대 앞의 ‘공간 초록’, 광안동의 ‘지하생활자들’,
대신동의 ‘산복도로프로젝트’, 보수동의 ‘말란드로’, 중앙동의 ‘히요방’과 ‘따뜻한 시도’.
지난달부터 친구들과 ‘책과 커피가 있는 달력’을 만들고 있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매일 한 권의 책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해본 일이지만
망미동에 자리한 독립책방 ‘한탸’와의 사귐이 없었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작당이다.
전국 곳곳에 있는 동네책방 일지에서 며칠 동안 한 권의 책도 팔지 못했다는 기록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소나 모임도 생명체와 같아서 돌보지 않으면 이내 멸종해버리고 만다.
장소가 사라지면 사람도, 모임도 함께 사라져버린다.
‘책과 커피가 있는 달력’엔 매일 누군가가 구매한 책 목록이 적혀 있어 매달 책방 친구들이 만드는 북큐레이션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탸’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그곳을 지키는 매일매일의 울타리가 된다.
작년 여름, 태풍이 불던 날 새끼 길고양이 ‘로쟈’가 ‘한탸’로 들어왔던 건,
그보다 오래전 대연동 재개발 지역의 길목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폴’과 ‘봄’이의 임시거처가 ‘생각다방 산책극장’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우린 그곳의 두 번째 방문객이었다.
자주 들렀던 장소엔 늘 길고양이가 먼저 와 있었다.
그곳을 보살피던 이들은 길을 잃었거나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새끼 고양이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한편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고, 여전히 그 고양이들을 돌보며 함께 살고 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것처럼 작은 모임과 공간을 돌보는 건 축적되지 않는 관계를 돌보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재생산 결과나 ‘미래’를 목표로 하지 않기에 통상적인 정상성의 기준과 동떨어진 이상한 돌봄 생태계.
모임을 하다 보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잠시 쉬었다 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먼저 와 있던 길고양이가 우리 또한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안심의 표지가 되었던 것처럼
이곳에서 여는 모임이 길을 잃은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표지가 되었으면 한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상한 생태’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서식지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1429.html#csidx7c6bae2fcb24718bf5bf39015d3281d
한반의 반도_10
재개발을 이유로 퇴거 명령을 받고 잔치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부산 남구 대연동 재개발지구에 자리하고 있던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2013년 6월에 퇴거 명령을 받았는데,
‘백수들의 유쾌한 실험실’을 자처했던 이들은 이 ‘재개발’ 통지를 ‘재능(재)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변주해 철거할 때까지
그곳을 주변 친구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 있거나 전시 공간이 필요했던 이들이 그곳으로 모였고,
하루를 즐겁게 놀고 싶은 이들도 날짜를 정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화장실과 다락엔 취미로 그렸던 그림이 전시되었고 생애 첫 라이브 공연을 열기도 했다.
제주 강정으로 보낼 후원금 모금 행사가 있던 다음날엔 파전이나 수박화채를 만들어 먹으며 밤새워 놀았다.
철거 덕분(?)에 한 달간 동네 페스티벌이 열린 것이다.
애초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문턱이 없던 그곳에 도착한 철거 통지서는 작은 마당이 필요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초대장이 되었다.
‘지역의 가능성’이라든가 ‘대안적 삶의 양식’이란 슬로건을 마치 만능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품고 돌아다니다
당도했던 ‘생각다방 산책극장’엔 ‘대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뭔가를 ‘돌파’하거나 ‘극복’하지 않고도 낯선 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그곳에선 누구도 ‘대안’이라는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주로 동네 친구들이 모이는 다방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공동주거를 실험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여행자들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다방에 모인 이들은 어딘가로 멀리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는 이들이었고,
멀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방에 들른 이들이기도 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헤매다가 다방에 도착한 이들이기도 했다.
다방은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고 무엇보다 ‘이상한(queer·퀴어) 관계성’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곳이었다.
다방의 묘한 편안함과 안락함은 집이나 가족과 같은 안정감이나 지속가능함을 전제하지 않는 관계 맺기를 통해 조성한 것이었다.
무질서해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눈엔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감각을 통해
비건으로 생활하기, 지구를 돌보는 생활 양식을 실천하기, 최소한으로만 일하며 살기, 비혼 공동체 만들기와 같은 실험과 실천을 꾸준히 해나갔던 것이다.
각자의 ‘이상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도 좋다는 표지로 가득했던 다방에선
누구도 이를 악물거나 서로를 향해 독기를 내뿜지 않고도 자기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희귀종 같기도 하고 이방인 같기도 했던 이들이 모여 있던 다방은 ‘이상함의 생태’로 조성한 서식지였다.
그 서식지에서 어울렸던 이들은 가난했지만 불안해하지 않았고 하나같이 당당했다.
2013년 여름부터 친구들과 함께 생활예술모임 ‘곳간’이라는 작은 모임을 꾸리고 있다.
이달에도 열릴 예정인 이 모임의 정기 프로그램인 ‘문학의 곳간’은 이제 76회차를 맞이한다.
‘문학의 곳간’도 ‘재능(재)계발 달력’의 하루를 빌려 처음을 열 수 있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쓰임을 잃어버린 ‘곳간’이라는 어휘를 되살려 쓰면서 그곳을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축적의 이름’이 아니라
누구나 들고 나며 각자의 보따리를 마음껏 풀 수 있는 ‘나눔의 이름’으로 변주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한곳에 불러 모으기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찾아가 만나고 사귀는 동안 배우고 익힌 것들이 있다.
특정한 제도나 지역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도 다양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실험해온 크고 작은 모임들이야말로 지역문화 생태계의 보고라는 것,
자생적인 모임의 가장 큰 동력은 서로가 서로의 목격자나 증언자가 되어주는 데 있다는 것,
뜻이 맞는 소수(취향 공동체)여서 모였던 것이 아니라 모임을 통해 각자의 특별함과 이상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취약함이라는 것이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성의 기반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의 곳간’을 찾는 이들은 ‘문청’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혜안이나 전문가적인 안목보단 각자의 이력을 덧대어 작품을 읽어내거나
자신의 생활과 삶을 이야기로 이어보는 것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었다.
누군가의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며 한발 한발 걸음을 떼다 보면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각자의 아픈 세상이 어느새 눈앞에 펼쳐져 있곤 했다.
얼핏 하찮고 못나 보이는 이야기가 귀 기울여 들으려는 사려 깊은 태도를 통해 귀하고 드문 이야기로 변하는
‘문학적인 순간’을 만날 때면 문학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각자의 세계 속에서,
곳곳의 장소에서 여러 개의 모습으로, 매번 다른 표정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의 곳간’엔 정교한 분석 비평보단 엉뚱한 상상이나 헛소리에 가까운 이야기의 힘이 더 세다.
언제나 책의 주제와 연결지어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는데,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었을 땐 ‘나의 짐-반려-취약성-힘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장기투쟁 현장의 목소리를 기록한 희정의 <여기, 우리, 함께>에선 ‘오늘도 싸우고 있는 누군가의 곁에서’라는 주제로,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은 ‘자긍심을 지켜준 모임, 장소, 관계’라는 주제로 자신을 소개해보는 것이다.
책과 매개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건 ‘나’라는 정체성을 보호해왔던 자아의 장벽과 문턱을 낮춰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제도적이거나 관습적인 것에 침윤되어 패턴적으로 읽고 말하는 방식을 반복하기보단
참석자들 각자가 조형해온 삶의 이력으로 비추는 이야기는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일쑤인데,
외려 이 이상한 궤적 덕에 헛발질과 헛손질, 헛고생에 관한 경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곤 했다.
성취한 것의 목록이 아니라 실패한 것, 좌절한 것, 중단한 것, 아무런 성과가 없는 듯 보이기에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
한 번도 목록으로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이 실은 사력을 다해서 잘 해내고 싶었던 것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 실패의 목록 곁에 ‘문학의 곳간’을 열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려 다시 부를 수 없는 장소의 이름을 적어둔다.
장전동의 ‘카페 헤세이티’, 온천동의 ‘책방 숲’, 부산교대 앞의 ‘공간 초록’, 광안동의 ‘지하생활자들’,
대신동의 ‘산복도로프로젝트’, 보수동의 ‘말란드로’, 중앙동의 ‘히요방’과 ‘따뜻한 시도’.
지난달부터 친구들과 ‘책과 커피가 있는 달력’을 만들고 있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매일 한 권의 책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해본 일이지만
망미동에 자리한 독립책방 ‘한탸’와의 사귐이 없었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작당이다.
전국 곳곳에 있는 동네책방 일지에서 며칠 동안 한 권의 책도 팔지 못했다는 기록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소나 모임도 생명체와 같아서 돌보지 않으면 이내 멸종해버리고 만다.
장소가 사라지면 사람도, 모임도 함께 사라져버린다.
‘책과 커피가 있는 달력’엔 매일 누군가가 구매한 책 목록이 적혀 있어 매달 책방 친구들이 만드는 북큐레이션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탸’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그곳을 지키는 매일매일의 울타리가 된다.
작년 여름, 태풍이 불던 날 새끼 길고양이 ‘로쟈’가 ‘한탸’로 들어왔던 건,
그보다 오래전 대연동 재개발 지역의 길목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폴’과 ‘봄’이의 임시거처가 ‘생각다방 산책극장’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우린 그곳의 두 번째 방문객이었다.
자주 들렀던 장소엔 늘 길고양이가 먼저 와 있었다.
그곳을 보살피던 이들은 길을 잃었거나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새끼 고양이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한편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고, 여전히 그 고양이들을 돌보며 함께 살고 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것처럼 작은 모임과 공간을 돌보는 건 축적되지 않는 관계를 돌보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재생산 결과나 ‘미래’를 목표로 하지 않기에 통상적인 정상성의 기준과 동떨어진 이상한 돌봄 생태계.
모임을 하다 보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잠시 쉬었다 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먼저 와 있던 길고양이가 우리 또한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안심의 표지가 되었던 것처럼
이곳에서 여는 모임이 길을 잃은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표지가 되었으면 한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상한 생태’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서식지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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