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의 반도_14
지금 쏟아져나오는 탈원전 ‘비판’ 프레임에는 지역에서 진행된 탈원전 논의의 역사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어떤 집단이 계속해 목소리를 빼앗기고, 비인간으로 상상되고,
‘밥그릇만 주면 조용해지는 존재’로 치부되는 일은 그 자체가 존재를 지우는 절멸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원전 사고나 방사능 유출과 같은 미래의 리스크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원전에 대한 정치공학적 담론과 지역을 둘러싼 차별적 지정학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인 것이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 가운데 부산시민의 입장에서 특히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다.
탈원전 논의의 역사와 정책 방향을 대하는 대권 도전자들의 입장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정계 입문 계기가 원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직접 밝히고, 첫 민생 행보를 카이스트 원자력공학도들과의 만남으로 삼았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진작부터 탈원전에 반대하는 ‘탈원전 투사’로 알려졌고,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현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되 가동 가능한 만큼 충분히 활용하자는 모호한 입장을 내놓았다.
탈원전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들끓고 있지만, 지역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차이가 없다’.
가열되는 ‘탈원전 공방’ 보도 또한 대부분 탈원전을 둘러싼 진영 간의 여론전을 격화시키는 데만 집중한다.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 국가인 한국에서, 자신의 생활반경 안에 원전을 끌어안고 사는 부울경 지역민들에게 원전 정책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누군가에겐 목숨이 걸린 문제를 그저 선거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는 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은 새롭지도 않다.
지역의 목숨을 볼모로 잡고 지역을 도구화하는 정치 공학은 선거뿐만 아니라 지역을 그리는 재현 관습에서도 반복되었다.
부울경 지역의 탈원전 논의의 역사는 이미 오래다.
2012년 부산환경교육센터의 조사에선 77.9%의 부산시민이 원전의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과반은 원전을 점진적으로 폐쇄해야 한다고 답했다.
2014년 동의대와 사회여론센터가 시민 대상으로 벌인 ‘원전안전 의식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세금을 더 부담하는 한이 있더라도’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흐름은 현 정부가 출범해 탈원전 기조를 본격화한 2017년 더 강화되었다.
당시 부산시의회가 주관한 여론조사에서 부산시민 73.2%가 탈원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의 전국민 대상 조사에서도 부울경 지역의 탈원전 의지는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원전을 직접 끌어안고 살면서 축적해온 지역 사람들의 경험과 논의의 역사는
‘탈원전 비판’ 프레임 아래 헤쳐모이는 정치세력 간의 다툼 속에서 깨끗하게 소거된다.
현 정부의 탈원전 기조와 정책이 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사고를 극화한
영화 <판도라>(2016)에서 시작되었다는 식의 논의가 ‘탈원전 비판’의 근거로 떠도는 건 점입가경이다.
2017년 6월, 기장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 이후 보수언론과 야권 인사들은 정부가 ‘영화 한 편 보고’
국가의 중요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지역의 오랜 바람이나 요구와 무관하게, 탈원전 논의가 그저 정권 변화나 ‘영화 한 편’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프레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역의 삶과 생명이 얼마나 가볍게 다뤄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판도라>의 문제는 따로 있다.
원전의 위험을 경고하는 영화조차 원전을 끌어안고 사는 지역을 타자화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는 단지 ‘영화 한 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 속 지역은 마치 모든 게 원전에 의지하고 있는, ‘원전마을’처럼 그려진다.
원전이 지역의 경제적 동력이며 지역주민들이 원전을 생존의 근거로 인식한다는 이러한 해석은 원전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질적인 차별 프레임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지성과 합리, 과학기술, 고귀함의 의미망을 따라 사회적, 지적, 정치적 주체들의 공간으로 재현되고,
지역은 모든 것을 ‘밥솥’으로 생각하는, 무지하고 경제적인 동물들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원전을 중심으로 서울과 지역을 거듭 위계화한다.
지역차별 프레임은 방사능 유출로 인한 지역민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층 교묘하게 작동된다.
지역 남성 노동자들은 방사능 유출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가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로 ‘선택’한다.
영화는 원전을 ‘밥솥’ 정도로 단순하게 여기는 지역 여성과,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원전을 필요로 하는 지역 남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내세워,
원전의 위험성을 지역민 스스로의 ‘무지’와 ‘필요’에 의해 부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판도라>의 젠더화된 지역 재현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지역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지역차별은 수동적이고 무지하며 무능력한 존재로 지역, 지역민을 규정하고
지역의 실태나 목소리를 비가시화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반복, 강화된다.
이러한 차별적 해석·감각체계가 되풀이되면서 원전과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지역의 삶이
과연 주민들의 선택과 필요 때문인지, 그리고 원전 문제의 근본적인 책임 주체의 자리는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은 감춰진다.
지난달 한 경제지는 정부의 ‘탈원전 선언’의 근거가 고작 ‘B급 영화’ <판도라>에 있었다고 얘기될 정도로 빈약했다며
4년 전 일부 인사들의 발언을 재차 반복했다.
탈원전 정책을 ‘손익보고서’의 측면에서 분석한 어느 주간지는 전력 수급과
글로벌 원전 경쟁력, 국가적 재정지출 상황을 들면서 탈원전에 ‘대가’가 따른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담론 프레임은 원전이 사실상 지역민의 ‘목숨값’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탈원전을 위해 기꺼이 ‘환경세’를 부담하겠다는 부울경 지역주민의 의지 또한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최근 여러 매체가 앞다퉈 국민의 탈원전 정책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합리성’을 내세운 숫자놀음과 지표 싸움에서 지역주민의 생명은 거론조차 되지 않다시피 한다.
원전 정책이 정치권에서 대선을 위한 입장표명의 전술 ‘아이템’으로 전락하고 지역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지역언론의 보도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미디어의 차별적 체계도 큰 문제다.
<부산일보>나 <국제신문>과 같은 지역 언론은 원전 안전의 컨트롤타워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부울경과 같은 원전 소재지로 이전하지 않고 서울에 잔류하게 된 상황을 보도하면서,
애초 이 원안위에 부울경 기관에 소속된 전문가가 ‘0명’이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관련 법제화 과정에서 원전 지역에 어떤 공론화도 없었던 문제,
고리 1호기 해체 절차와 관련해 주민공청회에서 나온 우려와 반발을 깡그리 무시한 채 해체 계획을 발표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만행도 다뤘다.
원전사업자인 한수원은 원전 지역을 대상으로 지원금과 발전기금을 기획·집행하는 주체로,
지역여론을 왜곡하고 지역민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역이 원전에 더욱 종속되게 만드는 기제는 이처럼 지역의 구체적인 현실이 걸러진 채 정보화되고 도구화되는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부산시는 2017년을 ‘클린에너지 부산’ 원년으로 삼고 탈핵 로드맵을 에너지 정책의 핵심 의제로 삼아왔다.
특히 원전 해체와 관련된 신산업 유치와 전문인력 양성에 대한 기대는 부울경 지역의 인구 유출 방지,
지역경제 활성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부산·울산 접경 지역에 건립하기로 한 원전해체연구소가 예비타당성조사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소식도 지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원전도시가 시시각각 새로운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와중에,
부산에서 친원전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토론회가 개최될 뻔했다.
윤석열 전 총장이 중심이 되는 이 토론회는 부산의 탈원전 기조와 정책, 제도, 여론이나 현실 문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하기 위한 자리였다.
지금 쏟아져나오는 탈원전 ‘비판’ 프레임에는 지역에서 진행된 탈원전 논의의 역사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지역주민을 ‘밥그릇만 아는’ 경제적 동물로 야만화하는, 젠더화된 가부장 신화와 서사의 반복 속에서
원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어떤 집단이 계속해 목소리를 빼앗기고, 비인간으로 상상되고, ‘밥그릇만 주면 조용해지는 존재’로 치부되는 일은
그 자체가 존재를 지우는 절멸의 과정이다.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경로와 단계를 거쳐 종국에는 생명을 앗아간다.
이런 절멸의 과정은 원전 사고나 방사능 유출과 같은 미래의 리스크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원전에 대한 정치공학적 담론과 지역을 둘러싼 차별적 지정학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인 것이다.
이는 원전도시 부산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지금 원전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누군가에게도, 또는 다른 어딘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반도 ‘모두’의 생명이 걸린 일을 지역에 할당해 처리하려 했을 뿐이다.
뜨거운 여름, 이 글자를 실어 나르는 전력조차 누군가의 생명을 싣고, 그 생명에 기대어 흘러간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5322.html#csidx5f6ed3a166746f398bcf3a2f26a9346
한반의 반도_14
지금 쏟아져나오는 탈원전 ‘비판’ 프레임에는 지역에서 진행된 탈원전 논의의 역사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어떤 집단이 계속해 목소리를 빼앗기고, 비인간으로 상상되고,
‘밥그릇만 주면 조용해지는 존재’로 치부되는 일은 그 자체가 존재를 지우는 절멸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원전 사고나 방사능 유출과 같은 미래의 리스크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원전에 대한 정치공학적 담론과 지역을 둘러싼 차별적 지정학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인 것이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 가운데 부산시민의 입장에서 특히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다.
탈원전 논의의 역사와 정책 방향을 대하는 대권 도전자들의 입장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정계 입문 계기가 원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직접 밝히고, 첫 민생 행보를 카이스트 원자력공학도들과의 만남으로 삼았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진작부터 탈원전에 반대하는 ‘탈원전 투사’로 알려졌고,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현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되 가동 가능한 만큼 충분히 활용하자는 모호한 입장을 내놓았다.
탈원전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들끓고 있지만, 지역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차이가 없다’.
가열되는 ‘탈원전 공방’ 보도 또한 대부분 탈원전을 둘러싼 진영 간의 여론전을 격화시키는 데만 집중한다.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 국가인 한국에서, 자신의 생활반경 안에 원전을 끌어안고 사는 부울경 지역민들에게 원전 정책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누군가에겐 목숨이 걸린 문제를 그저 선거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는 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은 새롭지도 않다.
지역의 목숨을 볼모로 잡고 지역을 도구화하는 정치 공학은 선거뿐만 아니라 지역을 그리는 재현 관습에서도 반복되었다.
부울경 지역의 탈원전 논의의 역사는 이미 오래다.
2012년 부산환경교육센터의 조사에선 77.9%의 부산시민이 원전의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과반은 원전을 점진적으로 폐쇄해야 한다고 답했다.
2014년 동의대와 사회여론센터가 시민 대상으로 벌인 ‘원전안전 의식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세금을 더 부담하는 한이 있더라도’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흐름은 현 정부가 출범해 탈원전 기조를 본격화한 2017년 더 강화되었다.
당시 부산시의회가 주관한 여론조사에서 부산시민 73.2%가 탈원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의 전국민 대상 조사에서도 부울경 지역의 탈원전 의지는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원전을 직접 끌어안고 살면서 축적해온 지역 사람들의 경험과 논의의 역사는
‘탈원전 비판’ 프레임 아래 헤쳐모이는 정치세력 간의 다툼 속에서 깨끗하게 소거된다.
현 정부의 탈원전 기조와 정책이 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사고를 극화한
영화 <판도라>(2016)에서 시작되었다는 식의 논의가 ‘탈원전 비판’의 근거로 떠도는 건 점입가경이다.
2017년 6월, 기장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 이후 보수언론과 야권 인사들은 정부가 ‘영화 한 편 보고’
국가의 중요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지역의 오랜 바람이나 요구와 무관하게, 탈원전 논의가 그저 정권 변화나 ‘영화 한 편’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프레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역의 삶과 생명이 얼마나 가볍게 다뤄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판도라>의 문제는 따로 있다.
원전의 위험을 경고하는 영화조차 원전을 끌어안고 사는 지역을 타자화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는 단지 ‘영화 한 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 속 지역은 마치 모든 게 원전에 의지하고 있는, ‘원전마을’처럼 그려진다.
원전이 지역의 경제적 동력이며 지역주민들이 원전을 생존의 근거로 인식한다는 이러한 해석은 원전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질적인 차별 프레임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지성과 합리, 과학기술, 고귀함의 의미망을 따라 사회적, 지적, 정치적 주체들의 공간으로 재현되고,
지역은 모든 것을 ‘밥솥’으로 생각하는, 무지하고 경제적인 동물들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원전을 중심으로 서울과 지역을 거듭 위계화한다.
지역차별 프레임은 방사능 유출로 인한 지역민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층 교묘하게 작동된다.
지역 남성 노동자들은 방사능 유출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가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로 ‘선택’한다.
영화는 원전을 ‘밥솥’ 정도로 단순하게 여기는 지역 여성과,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원전을 필요로 하는 지역 남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내세워,
원전의 위험성을 지역민 스스로의 ‘무지’와 ‘필요’에 의해 부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판도라>의 젠더화된 지역 재현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지역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지역차별은 수동적이고 무지하며 무능력한 존재로 지역, 지역민을 규정하고
지역의 실태나 목소리를 비가시화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반복, 강화된다.
이러한 차별적 해석·감각체계가 되풀이되면서 원전과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지역의 삶이
과연 주민들의 선택과 필요 때문인지, 그리고 원전 문제의 근본적인 책임 주체의 자리는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은 감춰진다.
지난달 한 경제지는 정부의 ‘탈원전 선언’의 근거가 고작 ‘B급 영화’ <판도라>에 있었다고 얘기될 정도로 빈약했다며
4년 전 일부 인사들의 발언을 재차 반복했다.
탈원전 정책을 ‘손익보고서’의 측면에서 분석한 어느 주간지는 전력 수급과
글로벌 원전 경쟁력, 국가적 재정지출 상황을 들면서 탈원전에 ‘대가’가 따른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담론 프레임은 원전이 사실상 지역민의 ‘목숨값’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탈원전을 위해 기꺼이 ‘환경세’를 부담하겠다는 부울경 지역주민의 의지 또한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최근 여러 매체가 앞다퉈 국민의 탈원전 정책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합리성’을 내세운 숫자놀음과 지표 싸움에서 지역주민의 생명은 거론조차 되지 않다시피 한다.
원전 정책이 정치권에서 대선을 위한 입장표명의 전술 ‘아이템’으로 전락하고 지역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지역언론의 보도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미디어의 차별적 체계도 큰 문제다.
<부산일보>나 <국제신문>과 같은 지역 언론은 원전 안전의 컨트롤타워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부울경과 같은 원전 소재지로 이전하지 않고 서울에 잔류하게 된 상황을 보도하면서,
애초 이 원안위에 부울경 기관에 소속된 전문가가 ‘0명’이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관련 법제화 과정에서 원전 지역에 어떤 공론화도 없었던 문제,
고리 1호기 해체 절차와 관련해 주민공청회에서 나온 우려와 반발을 깡그리 무시한 채 해체 계획을 발표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만행도 다뤘다.
원전사업자인 한수원은 원전 지역을 대상으로 지원금과 발전기금을 기획·집행하는 주체로,
지역여론을 왜곡하고 지역민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역이 원전에 더욱 종속되게 만드는 기제는 이처럼 지역의 구체적인 현실이 걸러진 채 정보화되고 도구화되는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부산시는 2017년을 ‘클린에너지 부산’ 원년으로 삼고 탈핵 로드맵을 에너지 정책의 핵심 의제로 삼아왔다.
특히 원전 해체와 관련된 신산업 유치와 전문인력 양성에 대한 기대는 부울경 지역의 인구 유출 방지,
지역경제 활성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부산·울산 접경 지역에 건립하기로 한 원전해체연구소가 예비타당성조사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소식도 지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원전도시가 시시각각 새로운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와중에,
부산에서 친원전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토론회가 개최될 뻔했다.
윤석열 전 총장이 중심이 되는 이 토론회는 부산의 탈원전 기조와 정책, 제도, 여론이나 현실 문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하기 위한 자리였다.
지금 쏟아져나오는 탈원전 ‘비판’ 프레임에는 지역에서 진행된 탈원전 논의의 역사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지역주민을 ‘밥그릇만 아는’ 경제적 동물로 야만화하는, 젠더화된 가부장 신화와 서사의 반복 속에서
원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어떤 집단이 계속해 목소리를 빼앗기고, 비인간으로 상상되고, ‘밥그릇만 주면 조용해지는 존재’로 치부되는 일은
그 자체가 존재를 지우는 절멸의 과정이다.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경로와 단계를 거쳐 종국에는 생명을 앗아간다.
이런 절멸의 과정은 원전 사고나 방사능 유출과 같은 미래의 리스크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원전에 대한 정치공학적 담론과 지역을 둘러싼 차별적 지정학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인 것이다.
이는 원전도시 부산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지금 원전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누군가에게도, 또는 다른 어딘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반도 ‘모두’의 생명이 걸린 일을 지역에 할당해 처리하려 했을 뿐이다.
뜨거운 여름, 이 글자를 실어 나르는 전력조차 누군가의 생명을 싣고, 그 생명에 기대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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